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마지막 침묵

커피우유- 2012. 1. 3. 10:34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울음은 사실 겉으로 툭 터져 나올 수 없는 울음이다. 마치 이 소설의 제목처럼 침묵 속의, 가슴이 우는 울음일 뿐이다.

 

마지막 침묵. 유혜자님의 번역.

책을 집어들 때 아주 생소한 제목이라면 번역자의 이름이 중요한 선택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유혜자님의 이름을 나는 기억한다. 아니 선호한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내게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소개해 준 분. 그리고 많은 독일 작품들을 만나게 해 준 분. 아이에게 읽어주는 동화책에서도, 내가 읽는 책에서도 참 많이 자주 만났다. 그리고 그 이름만으로 나는 작품을 신뢰한다. 그분의 선택을 믿는다. 후회한 적 없었기에.

 

소설의 시간은 1974년 여름의 어느 날에서 33년 후로 넘어가 1월, 그리고 6월 8일에서 13일까지의 6일간을 보여주지만 더 깊게는 등장인물들의 전생애다.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한다면 마땅히 일부분의 시간이 아닌 전생애를 설명해 주는 게 옳을 것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고작 하루의 일을 말하는 소설 <비둘기>에서 조나단의 전생애를 들려줬던 것처럼 말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나 하인리히 뵐 식의 서술, 독일 소설의 이 집요함이 나는 너무 좋다.

 

마지막 침묵에서 33년 후의 첫번째 장. <1월>에서 케톨라 반장이 퇴임식을 앞둔 날 아침의 움직임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퇴임식이 있던 날, 케톨라 반장은 아침 6시에 일어났다.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전날 저녁 침대 옆에 미리 준비해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초록색 점퍼에 어울리는 검정색 바지.

빵 두 쪽에 버터를 조금 발라 먹고, 신문의 헤드라인을 훑어보고, 커피를 마시고, 마지막으로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술 냄새를 없애려고 물도 한 컵 마셨다.

컵과 잔을 씻어서 식기장에 올려놓고, 신문지를 접어 올려놓았다. 그러고서 5분간 식탁에 앉아서 밤새 내린 눈에 덮인 이웃집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5분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부분을 읽으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아마 영화로 옮기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연인','향수', '내 생애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처럼 원작이 이미 영화니까 말이다.

 

소설은 상처, 아픔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다.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혼자만의 세상에 갇힌 아들을 둔 케톨라 반장. 딸의 죽음으로 삶의 모든 부분을 아프게 잃어버린 엘리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는 형사 킴모. 딸의 실종으로 더 이상 함께 할 의미를 잃어버린 칼레비와 루트 부부. 33년 전 젊은 날의 기억에 잠 못 이루는 티모 코르벤소.

 

얀 코스틴 바그너의 '마지막 침묵'은 영화 '아메리칸 뷰티'와도 닮았다.

인간 내면의 어떤 미묘한 불편한 감정들이 어떻게 그 사람을 소리없이 파괴시키는지 조용히 보여준다. 사실 이 불편한 감정이란 것이 소설 속 특정 인물들의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가질 수 있는 어딘가 아프고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거의 시간 속 나의 어떤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내게 아픈 거울일 수 있다.

 

티모 코르벤소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하고 있는 일도 잘 되어가고 사랑하는 아내와 좋은 친구들과 백야 파티를 즐길 여유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복의 요소들을 한순간에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게 하는 일. 그에겐 33년 전의 잊고 싶은, 잊고 지냈던 기억이 있다. 1974년 여름. 그가 목격했고, 그가 방조했고, 그가 묵인한 일.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괴로움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티모.

 

사실 아무도 그를 뒤쫓아오지 않는다. 그 스스로 돌아왔을 뿐이다.

범인은 이미 첫장에서 밝혀졌다. 얀 코스틴 바그너는 범인이 누구인가, 어떻게 붙잡히게 되는가 하는 것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한 사건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3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법의 잣대나 근거로도 해답을 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기에 그저 단순한 추리소설로 분류하는 것은 왠지 아쉽다. '마지막 침묵' 이 책 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33년이 지나도록 그 시간의 연장선상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태연히 빨간색 잔디깎는 기계로 잔디깎기에 열중할 뿐이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 흘러간다. 말도 안되는 태연함으로.

그리고 침묵할 뿐이다.

 

 

영화 침묵 Das letzte Schweigen The Silence (2010) 중에서.

 


마지막 침묵

저자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출판사
들녘 | 2010-10-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인간의 도덕적인 불안을 다룬 심리추리극!죄와 죄의식, 상실과 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