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메타세쿼이아, 여름을 부르는 내 나무

커피우유- 2010. 5. 6. 09:52

나무에게도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꼴찌는 메타세쿼이아가 아닐까 싶다.

봄, 개나리가 피고 벚꽃이 피고 매화나무, 살구나무가 꽃을 피울 때, 느티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가 조금씩 잎들을 키울 때에도 메타세쿼이아는 침묵한다. 수수꽃다리, 목련, 벚꽃이 만개할 때도 잠잠하기만 하다.

 

자연은 변주를 안다. 나서야할 때와 물러서 있을 때를 안다.

개나리와 벚꽃이 조금씩 떨어지고 꽃이 진 자리로 잎들이 더 공간을 넓혀갈 때 쯤 슬그머니 박태기 나무가 자줏빛 꽃을 피워 가지 가득 보송보송 꽃잎을 매단다. 그 앞으로는 조팝나무가 하얗고 앙증맞은 꽃들을 무리지어 하얀 꽃숲을 만들어낸다.

 

박태기나무와 조팝나무의 힘찬 합주가 계속되면서 봄날이 무르익는다.

그새 느티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가 잎들을 조금 더 키우고 꽃잎을 모두 떨어뜨린 벚나무도 연두색 잎을 키워 초록색 잎들의 연주에 동참한다. 그리고 연두빛 그늘 아래 어디쯤 명주나무는 촘촘히 다홍빛 꽃을 달고, 철쭉이 분홍색, 하얀색으로 만발할 때 쯤, 그 때 그제서야 메타세쿼이아는 작고 여린 잎손들을 내어단다.

봄의 정점에서 이제 슬그머니 실눈을 뜨는 것.

마치 여름이 온다는 신호같다.

철쭉과 영산홍이 붉어질 수록, 메타세쿼이아가 푸르러질 수록 여름이 가까이 온다는 증거다.

 

메타세쿼이아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버즘나무가 크리스마스 장식같은 방울을 매단 채 아직 아무런 요동도 없는 걸 보라며 내게 따져물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메타세쿼이아, 너를 오래 기다려온 때문이라고 미소로 악수를 청하면 새로 돋은 그 연하디 연한 잎들을 흔들며 반겨줄 것이다. 함께 5월을 맞자고 함께 푸른 초록빛 여름을 보내자고 말이다.

 

시작은 늦었지만 여름이면 그 누구보다 빛날 내 나무 메타세쿼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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