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너 혼자 올 수 있니, 세상에서 제일 슬픈 여행

커피우유- 2011. 11. 7. 16:53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오래된 풍경

불켜진 창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악수하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쓸쓸한 풍경

당신과 내가 어두운 우주를 스무바퀴째 걷고 있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따뜻한 풍경

내가 우는 나를 안고 젖먹여 재우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슬픈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본문 상실 #21 중에서

 

92

 시인과 촌장- 풍경

 

                                                                                                                 사진. 故이석주님

 

 

세상에서 제일 슬픈 여행을 떠난 사람. 그는 홋카이도를 선택하고 오직 눈. 눈. 눈사진만을 담았다.

온통 부옇게 흐려진 폭설이 내리는 풍경.

외롭고 그립고 그리운, 그리움의 빛깔을 닮았다.

 

첫페이지를 열어 만나는 그의 첫사진에서부터 막연한 무언가로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아마도 서문을 열심히 읽은 까닭일 게다.

그리고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 풍경을 바라 보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을까를 생각해본다.

 

 

 

아직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사랑에서 소외된 사람도

사랑을 꿈꾸는 사람도

 

사랑을 모른다

 

모르는 채로 우리는 사랑을 하고, 또 하고

버림받게 되거나 떠나게 되거나

미쳐버리거나

늙어가거나

사랑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거나

 

그 어느 날에 이르러

사랑에 대한 긴 휴식의 날이 찾아오겠지

 

그 때까지 우리는

-본문. 사랑 #05

 

 

그에게 눈 내리는 홋카이도는 온통 백지로 된 지도였다.

그는 길도 보이지 않는 그 지도 위로 다니며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따뜻한 풍경을 담아낸다.

길이 점점 눈에 묻혀갈 때 사랑이 길을 잃지나 않을까 확신할 수 없는 조바심에 아파하며 그렇게 그가 붙잡은 풍경들...

온통 눈에 덮인 고요한 그곳에서 그에게는 따뜻한 국물을 마실 수 있는 작은 골목의 식당도,

어느 창에서 쏟아지는 불빛도, 노을도 감사한 것이었다.

 

 

 

해가 서서히 지는 게 고맙지 않아?

만약 촛불처럼 갑자기 꺼진다면 어떻게 되겠어.

-너 혼자 올 수 있니 #09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고요한 눈의 이야기가 이것이었을까. 아름다워서 슬프다.

흐려진 시야 너머 아름답고 슬픈 거리가, 골목이, 나무가, 밤의 불빛이 간간이 보일 뿐.

그 길은 외롭고 온통 비어있다.

비우기 위해, 사라지기 위해 그는 여행을 떠났다.

나즈막한 그의 속삭임에 집중하며 따라 걷다보면 눈 쌓이던 골목도 끝이 나고 눈 쌓이던 철길도 끝이 난다.

책을 덮고.. 그의 여행도 끝이 난다.

크빈트 부흐홀쯔의 그림처럼 부옇게 흐려진 눈 내리는 사진들과 메모들 뿐.

 

그는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래서일까. 책을 덮었지만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페이지가 넘어가고 소복소복 눈이 내려 쌓인다.

 

 

당신이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던 것

당신이 보여주고 싶었는데

보여주지 못했던 것

당신이 껴안고 싶었는데

껴안지 못했던 것

 

그러나 나는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껴안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우리 영혼이 닿아 있어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 자장가 #18

 

 

 


너 혼자 올 수 있니

저자
강성은 지음
출판사
미래인 | 2011-01-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홋카이도로 떠난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고백사진작가 고 이석주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故 이석주님 블로그

호련. http://blog.naver.com/soar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