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오솔길 세번째 벤치/거기 숨 쉬는 일상

오늘

커피우유- 2010. 5. 14. 16:18

 

영유아기건강검진 시한이 일 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예방접종도 받아야한다.

아이를 씻겨 옷을 입히고 가디건을 대충 걸쳤다. 오전에 소아과 볼일을 보려면 서둘러야한다.

따가운 오전 11시의 햇살 아래 미간에 힘이 모였다 풀어졌다.

버스에 오르니 2인용 좌석에 모두 한 명씩 앉아 있다. 아이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맨 뒷좌석 뿐이었다.

괜찮다. 아이는 높은 곳에서 아래로 자동차 내려보는 걸 좋아하니까. 또, 하차벨이 바로 아이의 눈높이에 있어 벨 누르기 좋아하는 아이가 무척 선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버스를 타면 아이는 얼굴을 차 유리창에 붙이다시피 바싹 붙어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한다.

 

소아과에 들어서니 늘 그렇듯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아과에서는 늘 누군가는 울게 되어 있다.

아이의 키와 몸무게를 쟀다. 104.5cm, 19.5kg.

진료 전에 영유아기검진문진표를 먼저 작성해야한단다. 아이와 한 팔 정도 떨어진 곳에서 "연필. 학교" 등을 작은 소리로 얘기하고 아이가 들었는지 따라하는지를 체크하라는 게 첫번째 문항이었다. 

아이 뒤에서 "연필" 하고 속삭였다.

"연필" 따라한다.

ㅋㅋ 기특해 기특해... 나는 '예'라고 적힌 칸에 체크를 했다.

한 쪽 발로 서서 폴짝 한 쪽 발로 뛰기 테스트도 있었다. 아이에게 먼저 시범을 보여주며 해 보라고 했다. 이건 한 번만 폴짝 뛰어도 '예'란에 체크하라고 되어 있었다. 처음엔 어. 나 못하는데 하다가 폴짝 콩.콩.콩. 잘 뛴다.

그래. 잘 뛰었어. 이것도 '예'란에 체크를 했다.

어휘력 문진 질문에 <먹을 수 있는 것 세 가지 이상 대기>가 있었다.

"먹을 수 있는 거 애기해 봐." 하고 물었다.

"김, 과자, 아이스크림"

그래 그래 먹는 거라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지... ^^

문진표의 질문들은 평소 아이와 함께 생활하고 아이의 행동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쉽게 답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문진표를 제출하고 예방접종을 받으러 진료실로 들어갔다.

미리 오늘은 작은 주사 맞는다고 일러두었다. 미니냉장고에서 약 병 세 개를 꺼내 주사기 세 개에 나눠 꽃으신다. 주사기를 잠시 세워두고 영유아기건강검진에 해당하는 진료를 받았다.

청진기를 아이의 배, 등에 차례로 갖다 대었다가 떼었다. 입과 귀를 차례로 보고 왼쪽 팔에 주사 2대, 오른쪽팔에 1대를 맞았다. 왼쪽 팔에 주사 두 대를 용감하게 잘 맞았다. 주사를 맞은 자리는 작고 이쁜 테이프를 붙여 주셨다. 잘 참다가 아이가

"엄마, 주사가 좀 아픈데."

한다. 괜찮을 거야, 이제 마지막이야.

그리고 마지막 주사 한 대 바늘이 들어가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잘 참았는데 그래. 세 방은 좀 그렇지...

한 번, 두 번까지는 참을 수 있단 말야. 하지만 세 번은 참기 힘든 거야.

괜찮아. 괜찮아. 잘 맞았어. 이제 끝났어...

 

품 안에서 잠시 목놓아 울고는 시력검사를 받았다.

울음 먹은 목소리가 자꾸만 작아졌다.

-이건 뭘까.

-펭귄. (오리모양을 펭귄이라한다. --;;;)

그래도 많이 향상됐다. 지난 번  시력검사 때는 "이게 뭐지?" 하는 간호사에게 "검은색"이라고 답했었다. ^^;;;

-이건 뭐지?

-우산. .. 비행기... 자동차...

시력검사 후에는 청력검사도 받았다. 청력검사 받는 곳에 주사바늘이 많이 보이니까 또 주사 맞는 건 아닌지 걱정스레 물어본다. 마지막 문진표를 보며 상담을 나눌 때도 아이는 수시로 주사 얘기를 꺼내며 얼마나 아팠는지를 내비쳤다.

 

모든 순서가 끝났다. 아이가 좋아하는 초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주사를 잘 참아서 이쁘다고 얘기해줬다.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그런데 엄마, 주사가 좀 아프더라고." 한다.

그래. 주사처럼 아픈 일들이 앞으로도 또 있을 지도 몰라. 그 때마다 조금만 울고 그치렴.

 

마트에 들러 내일 아침 먹을 샌드위치 재료를 골랐다. 토마토 한 봉지, 오이 한 봉지, 슬라이스햄, 치즈를 담고, 저녁에 로스로 먹을 생오리고기도 샀다. 포도씨유 하나, 바나나 반 송이, 버섯까지 사니 제법 장바구니가 묵직했다.

이제 김밥사고, 식빵만 사서 들어가면 되겠다. 마트에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김밥집이 있는 곳에서 내렸다. 늘 김밥이 생각나면 일부러 들르는 집이다. 2줄을 포장해서 다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집 앞까지 가는 것이지만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려야 빵가게를 들를 수 있다.

샌드위치에 쓸 식빵을 사기 위해 빵가게에 들어갔다. 아.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부활의 노래가 흐른다. 그 시원한 목소리에 조금 피로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빵가게를 나와서 시장 야채가게에도 들렀다. 오리고기랑 같이 먹으면 맛있는 부추를 천 원어치만 샀다.

시장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조금씩, 내가 원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가격에 맞춰 살 수 있어서 일부러 마트에서 사지 않았다.

 

아. 드디어 오늘 해야할 일을 다 끝냈다.

짐들이 많아져 무겁지만, 양 손 가득 잔뜩 무언가가 들려있지만 해야할 일들을 모두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도 안도감을 안겨준다. 짐들을 집어넣을 공간이 있고, 짐을 내려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더 이상 조급할 필요 없다. 발걸음이 유순해진다.

 

아이는 주사 때문인지 대충 점심을 먹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