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우리 동네 과일가게 아저씨

커피우유- 2010. 8. 16. 11:49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스무 개가 채 안 되는 작은 가게들이 죽 늘어선 골목시장이 있다.

처음에는 이 집 저 집 가리지 않고 물건을 샀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단골가게가 생겨났다.

 

생선은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생선가게가 맛있다. <늘푸른야채>와 <봉자네반찬> 사이에 있는 <고향수산>.

아저씨 인상이 동글동글 편안하고 친절하고 좋은 물건에 가격도 저렴하다. 전에 겨울에 홍합을 산 적이 있는데 마트에서 먹던 것과는 다르게 정말 달큰하고 맛있는 홍합이었다. 매운탕거리를 사거나 하면 조개를 끼워주시기도 한다. 잘 가는 과일 가게 아저씨랑 생선가게 아저씨는 골목시장에서 점심동무 사이이다.

 

야채는 생선 가게 옆 반찬가게 다음에 있는 집, 오른쪽 끝에서 네 번째 가게에서 주로 산다. <늘푸른야채>, <고향수산>, <봉자네반찬>을 지나면 <대명야채백화점>가게가 나온다. 아저씨랑 아주머니랑 부부가 같이 야채를 파시는데 아무래도 두 분 다 충청도 분이신 것 같다. 위트와 유머가 있으시고 늘 웃는 인상에 두 분이 참 사이가 좋다.

이 가게는 주인이 앉을 자리 하나 없이 가게 내부를 층층이 합창단 좌석처럼 계단을 만들어 가게 가득 야채가 한 눈에 다 보인다.  야채들이 상석을 차지했으므로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서서 손님을 맞으신다. 이따금 아주머니가 쭈그려 앉아 계실 때도 있는데 조금 안쓰럽고 걱정이 된다. 특히 한 겨울 눈발까지 날리는 날, 가게 안에 계시지 못하고 야채들 옆 한길에 난로를 피우고 서 계실 때는 무척 안타깝다.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의 두 분. 두 분 때문인지 이 집 야채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들을 하고 있다. 싱싱한 야채를 파는 행복한 두 분으로 인해 그 가게는 사실 그 골목시장에서 단연 인기다. 언제나 야채를 사러오는 손님들로 북적여서 대충 한 서 너 사람은 기다려야 물건 구매할 순서가 찾아온다.

1kg에 얼마라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긴 하지만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천 원 어치만 주시면 안 돼요?"

조심스레 물으면

"왜 안돼. 달라는 대로 줘야지. 더 넣었어. "

허허 웃으시면서 언제나 봉지를 넉넉히 채워주시는 아저씨다.

얼굴을 익혀 놓아서 가끔은 서비스로 꼬마당근 등을 슬쩍 끼워 주시기도 한다.

"갈아서 쥬스로 먹어."

야채가게가 이 골목시장만 족히 일곱 여덟 군데는 되는데 유독 사람들이 이 가게를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행복한 표정의 야채들을 데리고 이제 과일 가게로 간다.

 

과일가게는 골목시장의 딱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고향청과>다.

처음에는 작은 가게 하나였는데 어느 새 가게가 확장되어 이제 가게 두 채를 걸쳐서 장사를 하신다.

이 집. 언제나 감동을 주는 과일 가게다. 세상에 감동을 주는 과일 가게가 몇이나 있을까.

바싹 깎은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검은테 안경을 쓴 주인아저씨는 언제나 눈에 힘이 있고 무척 학구적인 분으로 보인다.

 

바구니에 담긴 과일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가격을 확인하고 맘에 드는 과일을 고른다.

"오늘은 저 걸로 주세요."

하면 아저씨는 호쾌한 목소리로

"그러쎄요."

하면서 봉지에 과일들을 담아준다. 이 "그러쎄요." 하는 말은 참 긍정적인 힘이 느껴져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뭐든 허용될 것만 같은 유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그 아저씨처럼 나도 가끔 아이에게 이 말투를 따라한다.

-엄마. 나 아이스크림 먹고 DVD 볼래.

-그러쎄요. ^__^

이 "그러쎄요."는 최대한 밝고 유쾌하게 해 주는 게 중요하다.

"그러쎄요"를 들은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보고싶은 DVD를 골라 가지고 온다.

 

3000원 짜리를 고르든 5000원 짜리를 고르든 언제나 "그러쎄요." 하며 기분좋게 물건을 내어주는 아저씨.

덕분에 이 집 과일들을 데리고 돌아설 때는 무척 밝은 기분으로 미소지으며 돌아서게 된다.

 

감동은 고스란히 집까지 이어진다. 이 집 과일을 씻어서 한 입 베어물면 어디서도 맛 볼 수 없는 달콤함과 각각의 과일 고유의 맛이 진하게 느껴져 "아. 맛있다."가 절로 나온다. 사과는 사과대로 아삭거리면서 시원한 단맛이 나고, 토마토는 잘 익어 달큰하고 깊은 풍미가 느껴진다. 아이도 맛을 아는지 이 집 토마토만 먹는다. 마트에서 산 것도 우리가 먹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아이는 맛이 없어하며 거부한다.

수박은 수박대로 양쪽 끝을 잘라내고 반으로 가르면서 주방 가득 퍼지는 수박향에 벌써 맛이 감지되고 만다.

"와. " 올해 먹은 수박 중에서도 최고의 맛이다. 아저씨가 하우스수박이라며 껍질도 얇고 맛있겠다며 통통 두드려보시고 골라주셨다. 사실 수박이 은근 고르기 어려워서 혼자 덜컥 사길 좀 겁내는 과일인데 이 과일가게에서라면 걱정이 없다. 이 집에서 과일을 사고 맛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도대체 과일 하나 하나 어쩜 이렇게 최상품의 맛을 가진 것으로 아저씨는 가게를 채울 수 있었을까. 누구보다 부지런히, 누구보다 책임감있게, 그 어느 집보다 맛있는 과일만을 팔겠다는 장인정신이 지금의 가게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저씨는 언제나 당당하다. 나는 그 당당함에 고마움과 신뢰를 보낸다.

 

 

그 과일 가게까지 가는 동안 아저씨의 과일가게보다 훨씬 큰 가게가 여럿 있지만 그 많은 과일 가게들을 모두 지나쳐 나는 오늘도 골목시장 고향청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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