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추억일기 1 - 산책

커피우유- 2010. 8. 9. 15:30

창원은 조용히 산책할 수 있는 길이 많아서 참 좋다.
기쁨길을 따라 가다보면 수초가 우거진 하남천이 나오고 하남천길을 따라 가다보면 만남길이 나온다. 들국화와 칸나가 현란한 꽃길을 따라 어제는 홈플러스에 다녀 왔다. 보드라운 잔디가 발끝에 간지럽고 입추 지난 오후 네 시의 바람은 시원했다. 나무 끝에 매미들이 귀청이 따갑게 울어대는 통에 지나가는 아이들은 귀를 막고 가기도 했다.

 

창원에는 도시 어디든 자전거전용도로가 설치되어 있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더위가 부드럽게 가라앉은 오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바라보게 된다. 부산에서는 광안리 해변으로 자전거 달리는 모습에 참 반하곤 했었다. 노을이 지는 해변 모래 사장, 바닷물이 찰랑일 정도의 위치에서 해변을 따라 죽 자전거로 지나던 모습은 지금도 안 잊혀진다.

 

30분쯤 걸어 홈플러스에 당도했다. 3층으로 올라가서 아름다운 로망스를 듣고 '우동 한 그릇'을 다시 읽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펼쳐 보기도 하고 '그림 읽어주는 여자'라는 흥미로운 책도 열어보았다. 미술을 전공한 저자가 그림 속의 의미를 독자적인 생각으로 전달해 주는 책이었다.

 

책들이 놓여있는 곳 옆으로 페트샵이 있다.물고기들이 담긴 수조가 세 칸 나란히 있고 그 아래 햄스터, 이구아나, 토끼장이 놓여있다. 난 가끔 토끼를 보러 홈플러스에 간다. 한라미니토끼. 비어져 있다. '8월 11일까지 이 상품을 진열해 놓겠음'이라고 적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햄스터가 귀엽게 톱밥을 파고 이구아나가 먹이로 놓인 상추잎 위를 누비는데 토끼는 없었다. 토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좀 서운했다.

 

그 밖에 엄지손가락만한 도자기, 작은 재봉틀모양의 냉장고용자석, 작은 양념통, 아주 납작한 샌들, 코르크마개가 있는 국수통 등을 보았다. 여자에겐 아이쇼핑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을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발이 조금 아플 무렵 창 밖은 푸르스름하게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2층으로 내려가서 크로와상 두 봉지와 냉동실에 보관해 둘 식빵을 사 들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거기는 아주 작은 화원이 있는데 아가씨가 전화를 받다가 내가 들어서니 상냥하게 웃었다.
" 허브 있어요?"
" 허브는 없는데요. 죄송합니다."
허브가 없다는 것은 토끼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섭섭한 일이었지만 유난히 눈을 끄는 꼬마 선인장이 있어 화분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전화통화를 끝낸 아가씨도 옆에 쪼그려 앉았다.
" 이건 얼마예요?"
" 이건 수경재배하는 건데요. 값이 좀 비싸요. 하지만 잘 죽지 않고 물로만 키우는 거라 깨끗하게 키울 수 있어요."
마치 아가씨는 내가 화분을 아주 잘 죽이는 사람이란 걸 알아본 것 같았다.
" 저 걸로 주세요."
나는 처음 내 눈길을 끌었던 꼬마선인장을 골랐다.
" 얘도 꽃 하나 꽂아 주시면 안 돼요?"
" 아...꽃이요?"
" 네."
활짝 웃으며 아가씨는 화분들이 놓여진 곳으로 가서 다른 선인장에 꽂힌 꽃을 빼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 안 뽑아지는지 여러번 시도 하고 있었다.
" 아 이게 잘 안 빠지네요."
작은 가위를 이용해 결국 꽃은 뽑혔고 이제는 꼽는 순서. 그것 역시 선인장 가시로 인해 용이하지 않았지만 결국 꽂았다.
" 그런데 이거 가짜꽃인지 알았어요? "
" 네."
" 컴퓨터 앞에 놓을 거예요? "
" 네. 이거 물은 어떻게 주면 돼요? "
" 거의...음...보름이나 한 달에 한 번이라고 보시면 돼요.'

아가씨는 신문으로 흙이 쏟아지지 않게 두르고 비닐 봉지에 넣어 주었다.

 

크로와상과 꼬마선인장을 데리고 잔디를 밟으며 돌아오는 길, 하늘은 푸르스름하게 어둡고 바람은 선선했다.하나씩 둘씩 집들에 불이 켜지고 만남길 주택가로 들어서니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기름냄새로 골목들이 따스했다.
어두워지는 수풀들을 지나 다시 기쁨길.

기쁨 20길,기쁨 19길,....기쁨 7길, 기쁨 6길, 기쁨 5길, 기쁨 4길, 기쁨 3길.

그리고 여섯번째 집 문을 열면 된다.

 

어느새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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