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영화이야기

사과(2008)

커피우유- 2010. 8. 25. 09:25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해?"

"어. 영화 봐."

"뭔데."

"사과"

 

그렇게 사과는 내게 왔다. 그리고 사과는 계속 내 옆에 남았다. 자꾸 곱씹게 되는 영화. <사과>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잘 빠지게 되는 함정. 그건 사랑이 이래도 되나. 하는 자기반성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보는 사랑은 좀 더 완벽하고 좀 더 황홀하고 좀 더 설레게하고 좀 더 운명적이다. 환상이다. 그 기준으로 내 사랑을 들여다보면 따분하고 평범하고 초라해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사랑은 갑자기 힘을 잃고 길을 잃는다.

 

이 영화 속에서 민석의 사랑이 그랬다. 직장에서 인정받는 현정과 달리 민석은 아직 공부 중이었고, 자신의 미래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조차 확신할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이란 걸 해낼 수가 없다. 내 삶이 시시해질 때 사랑, 그것도 얼마나 시시해지는 것인지...

 

현정. 그녀도 그랬다. 민석과의 이별 이후 그녀에게는 새롭고 신나는 일이 없다. 자꾸 다가오는 새로운 사랑에도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채로 그를 알아갔고. 그렇게 그와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낯선 시댁식구들과의 모임도 재밌었고 어두운 밤 시골길을 걷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와 나누는 키스도 좋았다. 그녀에게 그는 "결혼하고 더 좋아진" 남자였다.  

 

나는 이런 영화가 좋다. 힘을 빼고 군더더기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영화가 좋다. 말하고 싶은 많은 말들을 꿀꺽 삼킨 채 선택된 장면 하나로도 충분히 더 뼈저리게 공감하게 만들어 준다. 늦은 밤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슬그머니 들어오는 현정의 모습에서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이 보인다든지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리고 현학적이지 않은 영화 속 배경들도 무척 맘에 든다.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이 영화 속 배경들은 절묘하게 영화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테헤란로는 매사 열정적이고 당당한 현정을 대변해주는곳이다. 그리고 공장이 즐비한 구미. 쓸쓸하고 적적한 구미는 현정과 상훈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무척 다행스러웠다. 구미에 2주 정도 머문 적이 있다. 고 노무현전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있던 해. 나는  그 2주를 구미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쓸쓸한 구미를 기억한다. 나무는 없고 오로지 삭막한 공장의 열기만 이어지는 도시였다. 도시는 조용했고 적적했고 생동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도시. 그 해의 구미는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구미는 현정과 상훈이 서로의 간격을 확인하는 장소로 가장 적절한 장소가 된다. 쉼과 위로는 없고 그녀가 버스를 타고 나가봤자 공장만 보일 뿐이다. 현정의 말대로 "여긴 아무 것도 없어"의 장소가 바로 구미였고, 그들의 결혼생활이었다.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될 그 때. 현정의 앞에 민석이 나타났다. 제주도 아름다운 바다에서 이별을 말했던 남자. 그 남자가 임신 7개월 된 그녀 앞에, 삭막한 구미의 한복판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흔들렸다.

 

 

그러나. 부부는 단지 남자와 여자만은 아니다. 부부는 남자와 여자이면서 동시에 아내와 남편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갖고 있다. 거기에는 두 사람만의 <완벽하고 황홀하고 설레게하고 운명적인> 시간을 이미 지나왔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사람들이 갖는 사랑의 환상이라는 것. 그 시간을 부부는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환상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맥없이 힘을 잃지는 않는다. 그게 민석과 상훈의 차이점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사랑한다. 사랑이 별 거 아니라는 걸 말해주면서 동시에 별 거 아니면서도 하나인 그 사랑이 사랑인 것을 말해주는 장면. 이혼 얘기가 오가던 그런 나날의 어느 저녁. 현정이 잠들어 있는 방에 쓸쓸한 표정의 상훈이 들어와 앉아 있다. 상훈은 물끄러미 아내를 쳐다보고 잠에서 깬 아내는 팔을 내민다. 그리고 지친 상훈은 그대로 그녀 옆에 나란히 눕는다. 뒤에서 그런 그를 껴안으며 현정이 하는 말.

"자자."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THE END. 영화는 끝이 난다.

 

나는 그 침실의 느낌을 사랑한다. 포근하고 안락한 방이었다. 위로와 쉼이 있고 화해가 있고 둘이 공존하는 방. 둘의 만남과 다툼과 화해와 둘의 함께 지나온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방. 사랑은 결국 그런 게 아닐까. 더 이상 완벽하고 황홀하고 설레고 운명적인 감정 없을 지라도 그것 없이도 편안하고 따뜻한 그런 것. 일상성도 견딜 수 있는 것.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힘있게 만들고 있는 남자 상훈. 영화 속에서 내내 그의 존재는 가슴이 아프다. 말들을 삼키는 모습도 그렇고 꿈 꾸는 사랑, 한없이 베푸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콘트라베이스'에서 묘사되던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연주자같다. 그녀가 숨쉬는 공기처럼 존재하는 그. 그녀가 그의 사랑을 자각했다는 건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사랑은 왜 때로 부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그가 머물렀던 공간 하나 하나를 추억하며 그녀가 그녀 안의 그를 발견해가는 장면. 참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과> 한 입 베어물듯 사과 하나, 사과 한 마디면 충분한 사랑이야기.

이 영화에서 사랑의 온도를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같이 들으면 좋은 음악들. 사과 OST도 아름답다.  

그나저나 친구는 왜 내게 이 영화를 꼭 봐야한다고 했을까.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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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과OST-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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