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영화이야기

[영화리뷰] 파주

커피우유- 2010. 4. 28. 09:58

비가 내리는 날은 붉은 비상등을 켜야한다.

비상등을 켜고 빗 속을 지나는 자동차 그 속에 무표정한 은모(서우)가 앉아있다.

파주로 간다.

 

 

 

 

은모는 인도여행에서 돌아오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선고처럼 들리던 그의 목소리, 자신만 남겨둔 채 어딘가로 떠날 것 같아 늘 불안했지만

유치장에서도 그녀의 대학등록금을 걱정하는 그가 목이 메여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자, 유치장에 웅크리고 누운 그를 보고 오던 날.

그녀는 인도로 떠나버렸었다.

그는 아직 파주에 있을까.

 

<파주>  

이 영화 속 파주는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고 보상문제로 철거민들의 저항이 진행되는 땅이다.

개발도 되기 전 파주의 입구는 최신식 모텔들이 먼저 들어서고

사람들의 터전이었던 집들은 아무렇게나 부수어져 저항의 장소로 이용될 뿐이다.

약탈당하고 억울해도 파주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파주는 어쩌면 우리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대변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가졌던 어떤 젊은 날의 죄책감이라든지,

그녀(은모)가 가졌던 행복했던 가족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라든지 하는 것들...

 

그 곳에 아직 그가 있다.

그는 8년 전 처음 이곳 파주로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안개가 자욱하던 날, 기차에서 내린 그가 플랫폼으로 내려선다. 파주다.

 

그에게는 첫사랑과의 아픈 기억이 박혀 있다.

파주가 그 기억을 지워줄 수 있을까.

첫사랑 그녀는 선배의 와이프였고, 선배가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그녀의 집에서 아기를 돌보며 함께 지냈다. 그는 늘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그에게 맘을 주지 않으려 애 썼다. 아니 맘은 이미 그에게 기울고 있었지만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로서는 그를 힘겹게 밀어내야만 했다.

그 사랑의 실랑이 속에 둘이 마음을 확인하는가 싶던 그 순간에 사고가 일어나고 그녀의 아이는 화상을 입고 만다.

훗날 그는 자신의 아내가 된 은모의 언니의 등에 난 화상흉터를 힘겹게 껴안으며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흐느껴운다. 그 일은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그렇게 파주, 형이 있는 곳으로 온 그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마치 그는 웃어서도 안되고 행복해서도 안된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교회 봉고차를 몰면서도 끝까지 교회로 들어가지는 못하는 그.

그의 시야 앞으로 휘적휘적 잘 웃는 그녀(은모의 언니)가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와의 시간은 그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너무 짧았다.

 

8년 후 은모가 돌아와 철거현장에서 철거대책위원회 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묻는다.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처음엔 멋져 보여서 한 것 같고, 그 담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어서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그에겐 갚아야 할 게 많았다.

화상을 입게 된 선배의 아이,

가스폭발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내,

언니를 사랑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은모.

그 모두가 그의 몫이었다.

 

처음 '파주' 이 영화를 볼 때 경계선이 모호한 조각들 뿐인 난해한 퍼즐판 같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퍼즐 조각들이 또렷하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상처많고, 외롭고, 두렵고, 죄책감에 짓눌리고 무겁고 아픈 사람들.

그래서 사랑도 쉽지 않은 사람들.

파주는 아무런 해결도 답도 보여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상처투성이인 채로 운무에 덮인다.

그 상처들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개발자들은 집을 세우고 또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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