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영화이야기

영화'정사'

커피우유- 2010. 5. 14. 08:58

서현과 우인

 

그들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우인은 그녀의 '비어있음'을 알아보았고,

서현은 그의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눈매'를 읽어냈다.

 

<알록달록 원색의 사람들 사이에서 무채색의 흑백티비처럼 서서

 허공의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

-우인이 본 서현이다.

 

서현이 본 우인의 느낌은 '어느 바쁜 휴일같은' 것이었다.

<일요일인데 오전에 너무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포멀한 양복을 입고 나왔지만

 오후에는 모든 일로부터 풀려나 햇빛이 따스한 공원에 그대로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사람 같은>

-서현이 본 우인이다.

 

 

 

 

 

情事 정사

 

비 내리는 봄날,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집 근처 도서관에서 '정사'를 찾았다.

낡게 색이 바랜 채로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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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와 한글부호가 책의 주소였다.

책은 미처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내게 전해 줄 것이다.어차피 시나리오도 이 원작자에 의해 나온 것이니 말이다.

내 짐작이 맞았다.

이 책은 영화보다, 아니 영화보다 더 나를 빠져들게 했다.

서현과 우인,

그리고 우리가 삶이라든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만남

 

 

공항에서 동생 지현을 기다리다가 서로를 알아본 그 며칠 후 둘은 까페에서 두 번째로 만나게 된다.

그 까페에서 서현은 홍차를 주문했다.

 

<서현은 포트넘 앤 메이슨을 좋아한다. 은제 티스푼에 각설탕을 하나 올려서는 적갈색의 차에 가만히 담근다. 그리고는 설탕에 찻물이 배어드는 것과 마침내 설탕이 허물어지면서 찻잔 밑으로 가라앉는 모양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서현의 차 마시는 부분에 대한 이 묘사는 마치 사랑에 빠지는 여자의 모습같다.

스며들다가 허물어지면서 가라앉는다... 곧 그녀는 이 사랑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것이다....

 

 

 

 

수족관

 

 

이 영화 속 수족관은 사실 서현의 집이다.

서현의 남편 준일이 늘 살펴보고 가꾸는 수족관인데 서현이 우인에게 마음 흔들린 날, 그 수족관에 가느다란 금이 생겼다. 분열의 조짐이다.

-조금이라도 금이 가 있으면 언젠가는 거기가 터질지도 몰라

그 미세한 금을 알아챈 준일의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 금은 서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영화 속 준일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건축설계사이다.

<워커런치를 즐기고 밤을 새우며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좋아하는 대학동창 유진의 마음을 알면서도 섣부른 행동을 자제하는 남자인 동시에,

그의 아내에게는 정해진 날짜에, 기계적인 섹스를 하는 남자다.

사랑의 확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또 하나의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행복이란 이 수족관 같은 것이었다.

행복을 묻는 우인에게 준일은

 

-행복이라... 행복이 뭐 별건가. 저 수족관을 봐. 물결은 잔잔하고, 온도도 딱 맞게 조절되고, 먹이는 어디로부턴가 끊임없이 공급되고, 나를 해치려는 사나운 고기도 없고,  그저 설렁설렁 헤엄치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 그런게 행복 아닌가? 그래서 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라고 말한다.

준일의 이 행복론은 결국 서현과 준일의 간격을 확인시키고 더 벌여놓게 된다.

 

 

 

 

서현, 길을 잃다

 

 

우인의 신혼집 벽을 칠하다 공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던 서현,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았다.

-우리 지금... 왔던 길로 다시 가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멀리 왔는지 몰랐어요.

 

 그리고 서울로 함께 돌아오는 길 샛길을 잘못 들어 칠흑같은 어둠 속에 놓인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죠? 안 되겠어요. 다시 되돌아 나가야지

 

그러나 어둠 속에서 서현, 우인에게 안기고 만다.

이제 되돌아 갈 수 없는 거다.

이 날이다.  서현의 집 준일의 수족관에 금이 생긴 날.

서현과 우인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 앞일을 알 수없는 채로 놓인 날.

 

 

 

 

 

 

우인에게 이 결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지현이 원하는 집과 우인이 살고 싶은 집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간격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고,

집을 고르면서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우인의 이 말은 지현과의 결혼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냥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그런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우인은...

 

두 사람의 간격은 그들이 선택한 집에서도 극명한 대비로 드러난다.

지현이 미국에 있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얻어낸 집은 도심지 한 복판의 주상복합형 건물의 50평 되는 아파트였고,

우인의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비원이 보이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굉장히 낡은 일본식 이층집이다.

우인이 호수가 보이는 집을 새로 꾸미고 정성을 들였지만 지현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리고 고궁이 보이고 넓은 창이 있는 그 낡은 집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인의 아름다운 창이 있는 집을 방문한 사람도, 그 집에 사는 우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도 서현이었다. 우인이 브라질에 살았던 적이 있는 것도, 그에게 우진이란 형이 있었다는 것도 지현에게는 한 적이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만 좋아하던 상처입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도 오직 그녀에게만 했다.

오직 그녀, 서현에게만 할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 그에게 귀를 기울여줬다.

 

우인의 오래된 집을 방문하던 날 서현은 우인과 첫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서현은 비에 젖은 채로 넋나간 표정으로 돌아왔다.

 

서현을 보고 놀란 준일이 묻는다.

-우산은 어쩌고?

-...잃어버렸나봐요.

서현의 마음,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바보같은 서현, 그녀 때문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 바보같은 서현을 알아보는 우인이 있어서 그래도 가슴이 꿈을 꾼다. 그런 사랑도 있는 거라고...

 

 

 

 

 

고백

 

준일의 초대로 서현의 집을 방문한 우인은 준일의 '수족관행복론'에 화가 나서 서둘러 돌아간다.

그리고 서현이 나올 때까지 비에 젖으며 기다린다.

비 내리는 집 앞 놀이터에서 이어지는 명대사...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로...사랑해요

-바보처럼...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죠? 나는 나이도 많고...게다가 아이까지 있는데 왜 나같은 사람을 좋아하죠?

-하지만...당신도 나를 좋아하잖아요. 내가 잘못 알았나요?

-...

-거봐요. 당신도 나를 좋아하죠? 왜 나같은 사람을 좋아하죠? 난 나이도 적고...게다가 아이도 없는데

 

 

 

사랑

 

 

다음 날 서현은 우인의 결근 소식을 듣고 어젯밤 놓고 간 서류를 들고 우인을 찾아간다.

<계속 내린 비로 그의 집 이층으로 가는 계단이며 거실의 마루는 습기로 눅눅했다.>

열과 한기로 아파하는 그를 재우고 약과 인스턴트 스프를 사오는 서현. 그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는 서현이 끓여 준 인스턴트 스프를 한 주전자나 비워냈다. 

그리고 비 내리는 우인의 집에서 둘은 처음 사랑을 나눈다.

 

자끄 프레베르의 '이 사랑'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렇게 격렬하고
이렇게 연약하고
이렇게 부드럽고
이렇게 절망하는
이 사랑
대낮처럼 아름답고
나쁜 날씨에는
날씨처럼 나쁜
이렇게 진실한 이 사랑
이렇게 아름다운 이 사랑

.

.

.

서현은 <자신이 아기가 된 듯한 환상>을 느꼈다.

여자는 사랑받을 때 누군가의 아기가 되는 것 같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는 테레사를 <요람에 담긴 아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아기처럼 쌔근쌔근 그의 품에서 잠을 잔다.

한없이 평화롭고, 아늑하게 보호받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따뜻한 시선에게 사랑 받는 느낌-

여자는 그렇다. 그럴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그녀는 이제 이전의 서현이 아니다.

이미 우인의 서현이 돼 버린 것...

 

 

 

운명

 

한 사람이 아홉 번의 인생을 윤회하면서 태어날 때마다 한 번씩 하늘이 맺어 준 운명의 사람과 만난대.

그냥 스쳐갈 수도 있고, 어쩔 땐 조금 만나다가 슬프게 헤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홉 번 중에 한 번은 꼭 사랑을 이룬대. 그런 사람을 소울 메이트라고 한대.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이루어질 때의 만남에서는 한 눈에 상대가 자신의 소울메이트라는 걸 느낀대

 

동생 지현이 서현에게 들려준 '소울메이트'이야기...

그러나 우인과 지현의 결혼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현의 아버지가 쓰러져 뇌사 상태로 병원에 눕게 된다. 아버지 곁을 지키던 서현은 아버지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 나한테 그랬죠.

 서현아, 넌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절대로 놓치지 마라.

 남생각말고 너만 생각해라. 이기적으로...

 그랬었죠?

 저도 그런 사랑이 생겼어요.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런데 바보같이 보내야 되는 사람이예요.

 당연히 보내야 되겠죠?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 나만 생각할 수가 없네요.

 아버지도 그래서 포기한 거죠?

 

리고 열흘 후 서현의 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다.

그렇게 영화 속 시간이 흘러간다.

 

 

 

 

이별

 

 

서현의 아이 진수의 농구경기가 있던 날,

참아온 사랑을 나눈 둘의 쓸쓸한 대화가 이어진다.

-당신 나이가 되면 나도 모든 게 선명해 질까요?

-아니요

-더 혼란스러워지나요

-그렇지도 않고,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아, 나는 안다.

비오는 날 불어난 흙탕물처럼 발 위로 쏟아지는 흙탕물의 무게,

무엇하나 건질 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주는 공포를...

빠르게 흘러가는 흙탕물 그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며 서 있어야 하는 지도.

 

그래서 서현은 훗날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것일 게다.

-그곳은 아마도 시간이 느리게 흐를 것 같아요.

우인의 어린 시절 브라질이야기를 들으며 서현이 했던 말이다.

브라질 마나우스.

 

 

- 당신과 떠나고 싶어요.

  당신 사랑한단 말도 못하죠? 해 본 적도 없고...

  바보처럼... 당신은 이제 늙어갈 텐데... 아무도 본 척도 안 할 거고

- 늙어서 죽을 텐데, 몸도 아플 거고,

  아무도 당신에게 사랑한단 말도 안 할거고... 당신도 할 기회가 없을 텐데.

  바보처럼... 다른 사람 때문에...

 

 

 

소울메이트

 

우인의 입장

 

우인, 그에게는 마음의 집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늘 1등만 하는 형에게 마음을 주었고, 가까이서 자신이 돌보며 위로했던 어머니에게도 형이 전부였던 그런 어린시절이었다.

그 쓸쓸하고 황막한 벌판에서 우인은 <비어있는 집> <서현>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서현, 그녀가 그의 집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서현의 입장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어있던 서현은 우인으로 인해 빈집에 불이 켜지고 따뜻함으로 꽉 들어찼다. 서현에게는 사실 독립이 필요했다. 좁은 천막 안에서 들었던 말의 울부짓음처럼 시원하게 큰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장녀로서의 의무감을 벗어버리고, 다소 이기적인 동생에 대해 엄마의 역할도 벗어버리고, 준일의 아내로서 정형화된 카탈로그 같은 삶도 벗어버린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그녀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정의하거나 규명짓지 못할 그 어떤 곳이 필요했고, 그곳은 자신을 채워주었던 우인, 그가 그리워하던 나라 '브라질'이 선택되었다. 그곳에서 이제 그녀는 서커스 천막 속에서 울부짖던 흰말처럼 자신의 내면을 터뜨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녀와 우인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비어 있지 않다.

게다가 그녀의 출발점,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 안, 그 어디쯤엔가 이미 우인도 앉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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