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냉정과 열정사이

커피우유- 2010. 10. 6. 18:45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영화를 먼저 볼 것인가. 원작을 먼저 읽을 것인가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영화 '밀양'은 원작보다 더 세심하게 원작을 잘 표현해 주었고, 영화 '프라하의 봄'이나 '향수'는 원작에 거의 가깝게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영화와 원작 모두를 사랑하게 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만난 '냉정과 열정사이'는  영화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원작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원작에 더 매료되었던 탓도 있겠지만 뭐랄까 영화가 마치 새로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일본의 정서가 우리와 다른 것인지 열정은 보이지 않고 냉정만 보이는 모습에서 사랑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의 길었던 시간의 간격과 영혼의 아픔을 표현하는 데 아무래도 소설쪽이 더 유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냉정과 열정사이. 이 작품을 나는 영화음악으로 먼저 만났다. 영화음악에 반해서 그 영화가 궁금했고, 소설 원작이 또한 궁금했다.

 

처음 집어든 건 '냉정과 열정사이Blu'. 츠지 히토나리의 것이다.

<냉정을 가장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터져나온 열정은 갈 곳을 몰라하며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구절에서 비로소 냉정과 열정을 모두 만났다. 그리고  The Whole Nine Yards를 들으면서 나머지를 읽기로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책 속으로 걸으며 발이 젖고 발목이 잠기고 무릎까지 물이 차 오르는 느낌. 이 책을 다 덮은 다음 내게 무엇이 남을까.

흐린 10월 어느 날의 오후. 그렇게 피렌체 거리를 쥰세이를 따라 걸었다.

 

 

연인들의 성지라는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는 두 사람. 그녀의 서른 번째 생일날 아오이는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만날 것을 약속해달라고 한다. 얘기를 나누는 시점으로부터 10년 후의 일이다. 그 얘기를 나누는 동안 쥰세이, 아오이 두 사람 모두 이후의 시간들에 대해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헤어지게 되는 두 사람. 그렇게 헤어진 채로 8년이 지났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면서 얼마나 상대방의 입장을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을까. 때로 많은 말들을 내뱉기보다는 꿀꺽 삼키게 된다. 때로 사랑이 그렇게 말문을 막기도 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채로 긴 시간의 간격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공기처럼 떠다니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다. 일상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름. 문득문득 차오르는 얼굴.

 

사랑에는 상대방의 상처까지 전제가 되어야할 것 같다.

살아온 날들이 다르고 살아오는 동안 받은 상처가 다르다. 그것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결국은 사랑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쥰세이가 메미에게. 아오이가 마빈에게 온전한 마음을 줄 수 없는 이유가 그런 것이었다. 보여지는 현재의 시간이 다가 아닌 것이다.

내밀한 영혼까지 읽어주는 사람. 쥰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은 그랬다. 그래서 떨어져 있는 동안의 시간이 지독하게 외로웠고 그래서 집요하게 그리움에 시달렸다.

 

소설은 두 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사이 Blu'는 쥰세이의 입장에서, 에쿠니 가오리가 쓴 '냉정과 열정사이Rosso'는 아오리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장밋빛과 파란색이 뒤섞인 하늘>이라고 표현했던 피렌체 두오모에서의 만남처럼 짙은 블루와 오렌지빛의 표지를 가진 책.

두 권을 모두 읽고나면 살며시 둘의 겹쳐지는 감정들이 만나진다.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우리가 과거에 놓쳤을 그런 감정이나 태도들.

 

이 책은 딱 제목만큼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무미건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격정적이지도 않다.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도, 성큼 다가서지도 못하는 게 사랑인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사랑은 사랑한다고 얘기해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사랑이 되기도 한다.

 

 

 

<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이것은 아오이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8년을 기다려 피렌체의 두오모를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는 쥰세이.

그는 과거의 기억들을 복원시키며 매일매일 아오이를 만나왔다.

 

  

 

둘의 이 사랑에 축복이 있기를...

노을이 내려 앉는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비둘기가 날고 종소리가 울리는 시간에, 400개의 계단을 다 오르는 날에 적어도 쿠폴라가 문을 닫는 6시 20분이 되기 전에 사랑을 만나게 되기를... 다시는 놓아버리는 일 없기를...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그랬으면 좋겠다.

 

75

  Ryo Yoshimata-The Whole Nine Yards,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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