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

커피우유- 2010. 10. 8. 10:45

책도 인연이 있는 것일까.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를 읽고 작가가 삽화를 그렸다는 동화책이 궁금해져서 검색해보고 깜짝 놀랐다. '잘 자라 아기 곰아'라는 제목이었는데 아. 이 동화. 이미 읽은 적이 있는 것이었다.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 도서관에서 그림이 너무 이뻐서 빌려온 책이었다. 이 동화의 그림을 퀸트 북홀쯔가 그렸다는 것. 게다가 번역가는 란이 선배가 너무도 사랑하고 좋아하는 시인 조원규님이다.

'잘 자라 아기 곰아'라는 동화책. 사실 아이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동화책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퀸트 북홀쯔를 만나듯, 조원규님을 만나듯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책을 하나 읽으면 또 다른 책으로 문이 열리고 두 갈래, 세 갈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아름다운 연쇄작용. 도미노처럼 하나하나 쓰러뜨리듯 책들을 만나가는 일. 이 가을에 너무도 어울리는 일.

 

오늘 말하고 싶은 주인공은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란 책이다. 이 책의 저자보다 이 책을 번역한 유혜자님이 내겐 더 친근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만나게 해 준 분이 아닌가. 이 분의 번역 작품으로 '좀머씨 이야기', '비둘기', '콘트라베이스', '호프만의 허기'를 읽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유혜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작품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는 햇살 좋은 벤치에 홀로 앉아 읽기 좋은 책이다. 근처 숲에서 오후의 나무냄새가 바람결에 실려와도 좋겠다. 그렇게 햇살 풍성한 곳에서 몽환적인 느낌의, 안개비가 내리는 듯한 그림 속으로 천천히 거닐어 보는 것이다.

 

화가 막스와 어느 소외된 소년과의 우정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막스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소년은 이따금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막스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늘 그림이 벽을 보도록 세워두었다. 소년은 막스의 집을 자주 방문했지만 그림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떠나면서 막스는 우편물과 꽃을 부탁하고 그는 소년에게 열쇠꾸러미를 맡겼다. 며칠 뒤 우편물을 챙겨 막스의 방을 찾은 소년의 눈 앞에 그림들이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다.

 

그 그림들은 모두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난 그렇게 그가 오직 날 위해 마련해 준 전시회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 뭉클한 구절 앞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도 소년의 옆자리에 나란히 서서 막스의 그림들과 만나게 된다.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면 거기 신비롭고 아름답고 꿈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 세세하게 그린 듯 하면서 어딘가 상상의 요소가 담긴 동화같은 이야기가 담긴 그림. 그의 그림은 안개비같은 운무에 덮여 있다.

 

 

 

  

아. 이 책. 그림만 오래 바라보아도 좋다. 그림보다 그림의 여백이 더 많은 말을 하는 그림이다.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착해지는 그림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림마다 뭔가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그러면서도 내 시선을 꼭 붙들어매서 그림 속으로 자꾸만 자꾸만 나를 빨려 들어가게 하는 특이하고, 정확히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막스는 언제나 '어느 특정한 순간'만을 그림으로 옯겨 놓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 이후에 뭔가 계속 이어져 나갔으리라는 것을 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그렇게 그림을 보는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느 특정한 순간, 그 이전 또 그 이후를 생각해 볼 것. 이제 그건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그림들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야해.

  어쩌면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 그림 속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막스의 얘기다. 그는 '순간을 채집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림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는 누군가 읽어내주기를, 발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년은 방학 내내 빨간 소파에 앉아 그의 그림 하나하나. 그 안으로 여행을 하며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음을 붙여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시력이 나빠 잠자리 안경을 써야했고, 약간 살이 쪄서 자주 놀림을 받던> 소년은 그렇게 막스의 그림 안에서 자라갔다.

 

여행에서 돌아온 막스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하는 일은 슬펐지만 막스는 소년이 평생을 바라보면서 위로받고 꿈을 꿀 수 있는 그림을 소포로 보내준다.

 

 

<알고 있나요. 내 그림 속에는 언제나 당신의 음악이 들어 있었어요>

그림 속에는 소년이 자주 파묻혀 막스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빨간 소파가 있고, 소년을 향하고 있는 그림들이 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년이 있고, 아름다운 발트해가 있다.

 

음악을 그린 그림, 그림을 연주한 음악이 하나가 되어 가슴 속에서 찰랑대는 퀸트 북홀쯔의 아름다운 그림들.. 그는 막스라는 화가의 이름을 빌려 그림으로 위로의 말을,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선물꾸러미같은 그의 그림 속에서 그가 숨겨놓은 쪽지를 찾아 읽는 건 모두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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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드폴-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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