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는 순간의 진실이다.
뭔가 납득이 잘 안 되고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섬광처럼 스치는 진실은 존재한다. 그게 꽁트의 묘미가 아닐까. 그 순간의 진실 때문에 끝까지 읽게 되고 결국 매료되고 만다.
흥미로운 책이었다. 자크 스테른베르크의 꽁트집 <그렇지만 이건 사랑이야기>
원제는 'Histoires A Dormir Sans Vous' 당신없이 잠드는 이야기다.
마흔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렸다. 어떤 이야기는 로맨틱하고, 어떤 이야기는 그로테스크하고, 어떤 이야기는 사실적이고, 어떤 이야기는 다소 황당하고 도발적이고 발칙하다. 사랑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여자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 속에서 작가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자의 면모 또한 다각도로 보여준다. 그처럼 여자를 정확히, 가장 사실에 근접하게 묘사한 이가 또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내가 본 프랑스영화들을 떠올렸다. 꼭 흥미로운 프랑스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꽁트니까 옴니버스식 영화가 되겠다.
어린 시절 관객도 몇 없이 상영되던 프랑스문화원의 극장을 좋아했다. 격월로 발간되는 상영일정표를 챙기고 보고 싶은 영화를 체크해서 시간을 맞춰 보러 다녔다. 그곳에서 반겔리스의 음악-'1492 콜럼버스'라는 영화에서였다-을 만났고, 제라르 드 디 빠르디유를 만났다. '프라하의 봄'도 그곳에서였다. 도대채 '프라하의 봄'을 몇 번이나 봤던지.
컴컴한 그 상영관에서 만나는 영화들은 뭔가 낯설고 뭔가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 인간적인 갈구라든지 고뇌가 가득한 영화들이었다.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고뇌>와 <발칙>이 아닐까 싶다. 고뇌와 발칙. 무척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두 단어처럼 내게 프랑스 영화들의 인상은 그랬다. 이따금 그들의 고뇌는 이해가 되면서도 그 이면의 발칙함은 또 낯선 모습들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까뮈의 소설들, 자끄 프레베르의 시, 장 자끄 상페의 글들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의 고뇌와 발칙함은 때로 위트와 유머로 변형되기도 한다. )
그들은 고뇌와 발칙함을 속시원히 털어놓는 법이 거의 없다. 암시와 함축으로만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가 알아차리기를 기다린다. 그런 점에서 자크 스테른베르크의 이 꽁트집은 소설들에서, 영화에서 느껴지던 그 오묘함을 총 망라해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발칙하되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고뇌하되 얽매이지도 않는다.
이 규정되지 않는 모호함이 결국 매력으로 남는다.
생각해보면 프랑스문화원에서 줄기차게 본 영화들의 주제는 늘 사랑이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를 고뇌하게 하는 것도, 때로 발칙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랑인가 보다. 사랑에 목마른 이들, 사랑에 목매는 이들 모두에게 뭔가 즐거운 깨들음을 남겨줄 지도 모르겠다. 자크 스테른베르크의 이 즐거운 고뇌와 발칙함이 말이다.
그 어떤 말보다 더 이 책을 잘 설명해주는 것은 마흔 두 편의 이야기 제목들이기도 하다.
예의범절/ 문학/ 유혹/ 노선/ 차이/ 우연/ 쌍둥이/ 접근/ 편지/ 이름/ 상실/ 재회/ 착각/
기억상실/ 차가움/ 연애편지/ 변태/ 헤어짐/ 생존자/ 비밀/ 건망증/
뜨개질/ 입맞춤/ 질투/ 만남/ 결혼/ 밤/ 오르가슴/ 거짓말/ 약속/ 기념품/ 시간/ 불만/
원예가/ 시작/ 단역배우/ 두 갈래 길/ 꿈/ 업무방해/ 세입자/ 다이어리/ 유리
와 닿는 제목을 찾아서 펼치면 우선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내 예상을 뒤엎는 이야기들을 만나며 뒤통수 맞는 일을 즐기게 된다.
이 책은 발칙하다. <그렇지만 이건 사랑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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