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눈물겹다

커피우유- 2010. 12. 29. 08:10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미셸 투르니에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살을 붙였다. 그리고 사진 속 내밀한 이야기를, 사진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를 들려준다.

 

뒷모습은 정직하단다.

꼬리를 물고 붉은 등을 켠 채 먼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다가 기억 속 내가 아는 이들의 뒷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한없이 가냘파서 늘 불안해보이던 오빠의 뒷모습. 언제 무너질 지 알 수 없이 위태로워 보였던 엄마의 뒷모습. 엄마의 뒷모습은 무척 정갈하고 정돈된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깊은 함정 위에 살짝 가려진 짚더미같은 것이었다. 언제 무너져 내릴 지 모를.

아버지의 뒷모습은 늘 애처로웠다. 종종 걸음을 걸으며 부지런히 생계를 위해 움직이던 뒷모습. 내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넓은 등을 가진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

 

뒷모습을 생각하다가 뒷모습이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사랑했던 이의 뒷모습만 기억하는 걸 보면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뒷모습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모종의 애틋함을 담고서 말이다.

 

그 애틋함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 <뒷모습>

힘겨운 노동의 뒷모습이 있고,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는 무대 뒤편의 모델, 끈을 조이며 도약을 준비하는 무용수의 모습도 있다. 굽어진 등으로 지팡이를 의지해 걷는 노년이 있고, 천진난만한 유년의 뒷모습이 있다. 남자의 뒷모습, 여자의 뒷모습이 들려주는 말들이 다르다. 뒷모습만 보인 채로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도 있고, 키스를 나누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도 있다. 한바탕 장이 섰던 곳은 에펠탑을 배경으로 쓰레기만 남기도 하고, 한 때 높으신 분들의 사랑을 받았을 정원이 채소밭으로 바뀌기도 한다.

사진첩을 넘기며 그들의 뒤에 서서 그들이 보는 바다를 본다. 그들이 보는 배의 선미 부서지는 포말들을 본다.

 

그러다가 채 넘기지 못한 채로 딱 걸린 사진 한 장. 제목은 '여자의 운명'이다. 예식을 이제 막 마친 이쁜 커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려주는 얘기치고는 넘 무거운 얘기였다. 여자의 인생이 해를 거듭할수록 '사막화' 현상이 일어난다는 그. <여자 주변의 인간적인 풍경이 황폐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당도하게 된 만년은 돌이킬 수 없는 유배지의 삶을 연상시킨다>고.

여자이기 때문일까. 그저 넘기기엔 공감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느끼는 초조함과도 무관하지 않은 얘기였다. 여자의 가엾은 열망을 남자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스무 살 남자의 그것보다 얇고 쏟아지기 쉬운 그것. 이브가 선악과를 먼저 따 먹었다는 것에 대한 형벌로 내려진 연모의 벌. 연모하다 연모하다 에덴을 잃고 결국 사막이 되어가는 것인가. 한때는 그래도 빛나는 에덴이었다.

남자 역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여자의 일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는 연모의 형벌대신 지겨운 종신의 수고가 주어졌다. 흙을 갈다가 흙이 되는 일 역시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은 그렇게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뒷모습에서 조금씩 기울어지는 노년의 뒷모습으로 가는 인생을 보여준다.

사진으로 뒷모습을 담은 에두아르 부바는, 그것을 글로 옮긴 미셸 투르니에는 이 뒷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마도 뒷모습이 보여주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모른 체 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그것.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간절히 호소하는 그것. 그것을 알아 달라는 말일지도 모른다. 외면하지 말라고. 부디 앞모습만으로 판단하지는 말아달라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그래서 눈물겹다.

 

-코트 다쥐르, 에두아르 부바 사진

<가난한 사람들은 수줍다. 추위를 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세상의 첫날처럼,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나가본다.

남자는 양말을 신은 채, 여자는 치마를 약간 걷어올리고,

그러나 이 즐거움과 정다움이 이 한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미셸 투르니에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