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고맙게도 우리들은 또 한 살을 먹는다

커피우유- 2010. 12. 27. 08:35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꾸는 정원에 대해 이유없는 적개심을 품거나 하지 말라는 짓을 일부러 저지르면서 즐거워하던 이가 원예가가 되었다. 1월부터 12월까지 그 원예가의 일년 열두 달을 쫓아가는 이야기다. 카렐 차페크의 <원예가의 열두 달>

 

읽기 전부터 흥미를 자아낸 책인데 이 책을 만나고 싶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얼마 전 읽은 '프라하 골목골목 누비기'에서 저자인 스게사와 가요가 카렐 차페크, 요세프 차페크 두 형제의 생가를 다녀온 것. 또 하나는 홍차 좋아하는 친구가 무척 좋아하는 홍차 브랜드 이름인 카렐 차페크 때문이다. 일본의 홍차 브랜드명인 카렐 차페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홍차점 카렐 차페크의 오너인 야마다시자씨도 일러스트 작가인 걸로 볼 때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다.

아뭏든. 나는 카렐 차페크씨가 궁금했다. 또 원예가의 열두 달이니 내가 좋아하는 나무이야기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우종영씨의 '나는 나무처럼 살고싶다'라는 책도 무척 좋아한다. 나도 그처럼 나무처럼 살고싶다. 아이도 나무처럼 키우고 싶다라는 소망과 함께.

이 책은 원예관련도서로 분류를 해야할까. 아니면 소설, 혹은 수필로 분류를 해야할까. 궁리가 필요할 정도로 참 실용적이면서 동시에 참 문학적이다. 아름답다.

 

 

손에 검은 흙을 잔뜩 묻히고 저물녘 허리를 세우고 서서 정원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원예가가 상상이 된다. 어디엔가 몰입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일 것 같다. 원예가는 정원 손질하는 일에 그렇게 온 정성을 쏟아내고. 다음 생이 있다면 꽃향기에 취하는 나비대신 지렁이로 태어나고 싶어한다. 정원에 생명의 원천이 되는 흙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카펠 차페크. 그의 흙예찬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다.

<원예가는 삽 하나 가득 흙을 퍼 올릴 때면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서 마치 숟가락을 집어들 때처럼 맛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물론 질 좋은 흙은 최상급의 고급 요리처럼 너무 진하지도 무겁지도 않다. 또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그리고 너무 건조하지도 끈적거리지도 않는다. 너무 오래 되거나 지저분하거나 건방지지도 않으며 마치 갓 구워 낸 빵과 같다. 이는 꿀이 들어간 바삭바삭한 쿠키와도 같고 촉촉한 케이크 같기도 하고 효모를 넣은 경단 같기도 하다. >

 

이 사랑스런 원예가에게서 나는 생명의 희열을 맛본다. 생명을 키워내는 원예가는 나약하지 않다. 대신 옹골차게 건강하고 다부진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해준다. 검은 흙 속에서 싹을 띄우는 숱한 생명들을 보면서 <우리가 쓸쓸하다고 노래하는 것은 난센스다. 살아있는 인간, 즉 성장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감동적이다.>라고 들려주는 것이다.

1월에서 12월.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이 흘러가는 것이겠지만 원예가에게 한 해가 가고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건 고마운 일, 감동적인 일이 된다. 원예가는 미래를 살기 때문이란다. 정원의 장미가 내년이면 더 예쁘게 필 것이라고, 십 년이 지나면 작은 나무가 큰 한 그루 나무가 될 것이라고, 자작나무가 오십 년 후에 어떤 자작나무가 되는지 어서 오십 년이 지나 보고 싶다고.

<원예가에게 있어 가장 감동적인 것은 바로 우리들의 미래이다. 즉, 새해를 맞을 적마다 높아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 고맙게도 우리들은 또 한 살을 먹는다.>

 

 

1월 전문원예가가 씨만 뿌려둔 땅에서 새로 돋는 잔디를 만나고, 잡초를 뽑아내고, 흙을 일구고, 꽃들을 심으며 12월을 맞아 다음 새싹들을 기다리며 한 살 먹는 것을 고마운 일이라고, 감동적이라고 말해주는 그가 참 고맙다.

내 안의 척박한 정원에서 나도 내년엔 씨앗을 머리에 이고 나오는 여린 떡잎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처럼 엉덩이만 보이며 부지런히 내 정원을 가꾸어야하겠지.

 

비, 햇볕, 바람, 흙, 그 모두를 감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 <원예가의 열두 달>

미처 보지 못한 흙 아래 무수히 숨쉬는 새싹들과 우리 안에 있는 미래도 함께 바라보며 꿈꾸게 해 주는 책이다. 아름답다. 참 아름답다.

 

<원예가의 열두 달> 중에서. 요세프 차페크 그림

-원예가는 늘 엉덩이를 보이며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