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파이이야기, 오늘 난 죽는다. 아니다 산다.

커피우유- 2011. 1. 12. 09:06

다소 엄숙한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파이이야기>

왠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꽤 묵직한 느낌의 책이었다. 예감은 적중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세 가지 종교를 모두 받아들이는 참 당돌한 종교심의 소유자 파이(π).

사람들은 그를 파이 파텔이라고 불렀다. 정확한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

새벽 5시에서 6시면 어김없이 표효하는 사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몇 날 며칠이고 똑같기를 바라는 동물들처럼 반복되던 일상, 그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사원을 요일별로 찾아다니며 예배를 즐기는 신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바다 한 가운데 홀로 남겨진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가족이 이민을 떠나는 길이었다.

 

폭 2.4미터, 길이 8미터의 구명보트에 단 한 사람 홀로 남겨진다면? 게다가 거대한 뱅골호랑이와 함께 그 작은 공간을 나눠 살아야한다면? 이 사실만으로도 책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살아야했고, 보트를 뒤져 물품함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것들을 헤어보았다. 배멀미약, 500ml 물 24깡통, 구급식량, 담요, 태양증류기, 구명조끼, 양동이, 낚시도구, 빗물받이, 볼펜, 초컬릿, 생존지침서 등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 면에 98줄이 그어진 공책 1개

가벼운 옷차림에 신발 한 짝을 잃은 소년 한 명

점박이 하이애나 한 마리

뱅골 호랑이 한 마리

구명 보트 한 척

바다 하나

신 한명

 

그는 말한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나도 거기 속한다-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는 끝까지 싸웠다. 지독히 탐욕스럽던 하이애나는 뱅골호랑이가 해치웠다. 그리고 그는 공포심의 끝에 서서 뱅골호랑이를 길들이기로 한다. 사실 그는 자랑스런 인도 폰디체리의 동물원 집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동물들의 배웅을 받으며 등교를 했고, 나날이 동물들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표류기간 내내 더 없이 의지상대가 된 뱅골호랑이의 이름은 '리처드 파커' 어린 시절부터 동물원에서만 자라온 리처드 파커는 다행히 순순히 파이와 영역을 나눠가졌고, 파이에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대신 표류기간 내내 파이는 리처드 파커의 식사를 책임지고, 리처드 파커의 마실 물을 준비해주었다.

 

얼마나 고독했을까. 정적에, 외로움에 빠져들 때면 그는

리처드 파커를 손짓하면서 크게 "이건 신의 고양이다!" 라고 고함지르곤 했다.

구명보트를 가리키면서 목청껏 "이건 신의 방주다!" 라고 소리지르곤 했다.

엄마 생일이라고 짐작되던 날, 그는 큰소리로 엄마에게 "해피버스데이" 노래를 불러드렸다.

광활한 바다 위에서-

 

여덟 시간에 하나씩 먹던 비스킷은 금새 바닥이 났다. 그가 바다 위에서 표류한 시간은 모두 227일간이었다.

 

소용없다. 오늘 난 죽는다.

 

오늘 죽을 거야.

난 죽는다

더 이상 펜이 없어 기록하지 못한 마지막 일기. <오늘 난 죽는다> 그러나 그는 살았다. 리처드 파커도 함께 살았다.

 

 

어쩌면 위협적일 수도 있고, 생의 의지를 꺽을 수 있는 존재였던 리처드 파커. 책을 읽는 내내 그 뱅골호랑이를 생각했다. 삶이란 때로 기가막힌 일을 안고 살아가야할 때가 있다. 돌보고, 긴장하고, 신경쓰고, 나 혼자만으로도 벅찬 길을 동행해야할 때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망망대해의 작은 구명보트 안에서 오로지 홀로 남았다면 더 일찍 지치지 않았을까. 파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몸을 일으켜 낚시를 하고 연명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먹여살려야하는 뱅골호랑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뱅골호랑이가 너무 많이 먹는다는 건 참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227일간의 표류를 끝내고, 나는 책을 덮는 시점. 발 밑은 여전히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것만 같다.

날마다 절망하면서도 날마다 다시 일어서던 파이. 그처럼 오늘 내 삶의 밧줄을 동이고, 남은 물품함을 점검하고, 비가 내리는 날은 빗물받이를 설치하고, 맑은 날은 물고기를 말리면서 또 하루를 살아내야겠다.

나는 그보다 가진 것이 많고, 그보다 공간이 넓고, 게다가 뱅골호랑이도 없지 않은가. 심지어 이곳은 육지다.

생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