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책그림책,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상상

커피우유- 2011. 1. 14. 07:53

책그림책, 그야말로 상상력의 결정판이다.

표지부터 흥미로웠다. 왼손에는 초승달을 들었고, 바다로 들어가려는 듯이 신발까지 벗어 들고 서 있는 한 남자. 그는 맨발이고, 그의 앞에는 바다가 그려진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다. 크빈트 부흐홀츠의 이런 그림을 좋아한다.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 '잘 자라 아기곰아' 이후 세 번째 만나는 그의 그림들이다. 참여한 작가로 밀란 쿤데라, 미셸 투르니에도 눈에 들어온다.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46점이 46명의 작가들에게 보내졌다. 그들은 그림 한 장만 보고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아무런 개연성없이 만들어진 <책그림책>. 그저 그림 한 장 우편으로 받아든 46명의 작가들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이 우연을 받아들면 된다.

꿈 속인듯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속으로 뚜벅뚜벅 발자국 남기며 걸어가듯이-  

 

<그러나 길은 있는 법이다. 나는 이제 내 생의 후반부에 들어섰다. 그러므로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나는 그 책들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읽을 것이다.>

마르크 퍼티의 이 글은 '책 읽기'에 대해 한 번 돌아보게 해준다. 왜 책을 읽는지, 우리가 읽는 책들의 의미는 무엇인지 같은.

책을 한 권 집어들고, 무언가 놀라운 비밀을 캐내기 위해 우리는 책을 탐독한다. 그러나 다 읽고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제 2권, 제 3권.. 그런 식으로 책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책읽기에 골몰한 남자 뒤로 쌓인 책은 하늘까지 닿을 듯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 후반부. 책더미 앞의 남자는 다시 그 책들을 읽기로 한다는 것.

어린 시절, 경이로운 눈으로 읽었던 책들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게 되는 일들이 있다. 나 역시 알퐁스 도데의 '별' 단편집을 다시 읽었고, 알프스소녀 하이디를 다시 읽었다. 일부러 찾아서. 지금도 읽고 싶은 책들 중에는 과거에 이미 읽었던 책들의 목록이 더 많다. 나로서는 왜 이런 증상이 생기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은 듯 즐거운 부분이었다.

 

이 책은 조금 어렵다. 그러나 크빈트 부흐홀쯔의 그림을 감상하고 느껴지는 나의 느낌과 그 그림에 곁들여진 작가의 정찬을 맛본다면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끈기만이 보람을 만들어 줄 것이다. 개성만점인 작가들을 46명이나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일일이 그들의 연보를 꿰고, 이력을 듣고, 악수하며 다니는 것보다는 이 편이 수월하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흥미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맘에 드는 글을 쓴 작가가 있다면 그 이름을 따로 메모해둘 것.

 

이 책을 집어들게 한 밀란 쿤데라의 글은 역시나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다. 그는 내 마음에 쏴아 한 줄기 물줄기를 쏘아주는 멋진 작가다. 그의 이름이 더 소중해지는 시간이다. 아쉬움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는, 기대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는 작가, 밀란 쿤데라. 짧은 한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그의 매력을 느끼는데 충분하다.

 

책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 대지의 심장박동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연인은 굽이치는 산들을 바라보며 하늘을 난다. 책 속의 혀와 황홀한 키스를 나누고, 아직 침상에 있는 그녀 앞에 쓰다만 책이 놓여져 있다. 마시다 만 커피, 쓰다만 책, 조금밖에 남지 않은 잉크병이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소녀는 책을 밟고 올라가 창 밖 풍경을 내다본다. 책이 어린 소녀의 키를 키웠다

때로 책은 길을 안내하고 퍼즐을 완성하며, 비도 피할 수 있다. 책도 혀가 있고, 책도 피를 흘린다. 라디오를 청취하듯 책을 청취하는 사람, 지붕 위 안테나에 꽂힌 책. 크빈트 부흐홀츠의 상상력은 놀랍다. 낯설지만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책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 모든 상상을 이 <책그림책>으로 만난다. 크빈트 부흐홀츠는 46편 그림 대부분에 책을 그려 넣었다. 대범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책은 그림의 전체이거나 언제나 그림의 중심에 있다.

 

그의 그림처럼 우리는 책과 함께 유년을 보냈고, 책과 함께 역사를 산다. 그리고 앞으로도 책과 함께 환상적인 여행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마음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책이다.

 

 

여기가 좋다. 정확하게 두 마을 사이의 중간인 이 장소가.

어제의 마을은 이제 내 뒤에 있다. 그리로 결코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마을이 아직 보이지 않는 동안, 지금 나는 홀로 있을 것이다.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책그림책 p54,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