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일흔의 목소리

커피우유- 2011. 1. 19. 08:14

일흔. 일흔이 되면 어떤 세상이 보일까. 엷은 노란빛을 띄며 온통 따뜻해 보이는 시야를 갖게 될까.

페터 빅셀의 일흔의 목소리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를 만났다. 겨울에 읽기 좋은 책이다.

 

 "이건 내 책이야" 조용히 외치고 싶은 책. 그랬다. 정말이지 이건 내 책이다. 그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빠져들만큼 근사한 문장들로 써 놓았다. 그의 글을 읽으면 그림이 그려진다. 역으로 쫓아가는 소년과 증기기관차의 검은 그을음이 보이고, 정장을 입고 일요일 산책을 나서는 아버지와 그 뒤를 따르는 아들이 보이고, 전화기를 처음 들여놓던 날 공중전화로 뛰어가 다이얼을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책읽기의 기쁨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읽고 싶고 활자 사이에 머물고 싶은 페터 빅셀의 문장들. 하인리히 뵐을 만나는 것만 같다.

 

첫번째 칼럼을 읽고 바로 책을 덮었다. 이대로 술술 읽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의 글은 한 편의 칼럼을 읽고 충분히 음미해야한다. 그 안에 담긴 색, 맛, 냄새, 기억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이 책에서는 그렇게 모두 38편의 칼럼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속에 그의 관심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뜻한 기억, 작은 것,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기에 대해서, 힘 없고 약한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고 겪는 소소한 일들의 빛나는 순간에 대해서 떠올리게 하고 조우하게 해 준다. 그리고 우리 안에 따뜻한 것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그는 원하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깊고 고요한 생각들. 페터 빅셀 그의 무채색 사유가 아름답다.

 

<역에 있을 이유없이, 그러니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감탄하며 무언가 구경하거나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도 그저 거기서 서성이는 법을 배웠다. 그냥 여기있기. 그냥 존재하기. 그냥 살아있기>

어린 시절 역에 가면 늘 그 자리에 있던 지적장애인 에밀. 그의 눈에 에밀은 진정한 어른이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아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많은, 그것도 아주 많은 사람. 그리고 그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우리는 참 맑고 투명한 눈을 가지게 된다. 아무런 편견없이 보여지는 대로 감탄하며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 오직 어린 시절에만. 그냥 여기에 그냥 존재하는 것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에밀은 보여주었고 그는 보았다.

 

<의미있는 일만 해야한다면 인생은 삭막해진다. 일기장에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음'이라고 적은 그 오늘도 상황에 따라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을 수도 있을테니>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음. 아. 얼마나 특별한 날인가.

 

그의 글은 자꾸만 글 안에서 서성이게 된다. 무심히 말하는 듯 하지만 묵직한 존재의 무게감이 이야기 끝에 딸려나온다.

기본적으로 그의 언어는 따뜻하다. 그는 아내를 '나중에 내 아내가 된 소녀'라고 부르고 그녀가 떠난 이후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잡동사니에서 그녀의 삶의 흔적을 볼 수 있어 기뻐하는 남자다. 그러기에 그의 글들은 아름답고 따뜻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작은, 아주 작은 소속감><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 스테이크용 포크를 바라보며>< 오늘은 일요일 >< 후고를 그리며>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황소> 등은 정말 아름답다.

 

그는 생각을 자유자재로 주물러 근사한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내일은 낱말들을 길들여, 격자 칸에 십자로 넣어보아야겠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면서 나는 기뻐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인사를 받고 인사를 한다는 것은 우울한 날에 약간의 온기를 가져다 주는 행위다

-행복의 많은 부분은 햄과 빵조각의 두께와 관련이 있었다

상투적이지도 현학적이지 않은 그의 문장들이 참 좋다.

그래서 그의 글을 탐내며 읽는 시간은 무척 달콤하다. 설탕을 잔뜩 묻히고 빨간색 토마토 케찹을 물결무늬로 뿌린 핫도그를 야금야금 베어물면서 뽀득뽀득 눈길을 밟는 기분이랄까. 온갖 시간들, 온갖 풍경들, 온갖 냄새, 온갖 기억들. 지나온 시간 한 번은 느꼈을 그런 단편적인 인상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누가 또 기억을 이처럼 기막히게 환기시켜 줄 수 있을까.

 

아프고 슬픈 이야기도 그는 그만의 담백한 논조로 조용히 마음에 울림을 준다. 그의 도구는 날카롭지 않고 뭉툭하지만 가슴을 툭 건드리며 꿰뚫는 힘이 있다.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황소'에서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무력하게 하는 지를 말한다. <모든 권력은 공포다. 권력은 자신이 퍼뜨리는 공포를 먹고 산다. 권력을 원하는 사람들은 일단 공포를 퍼뜨려야한다.>

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만 만났던 황소. 이 황소는 어린 페터빅셀을 유독 따랐다. 자신처럼 무력한 아이. 겁이 많던 아이. 그러나 페터 빅셀은 그 황소를 훗날 도살장으로 끌고가야했다. 그에게는 잊지 못할 가슴 아픈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크고 힘있는 황소를 무력하게 만든 권력의 공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편안하고 질서있는 무질서'에서는 환경문제를 얘기한다.

<우리는 무질서만이 아니라 아마 질서 때문에 환경을 훨씬 더 많이 파괴할 것이다. 우리 마음에 들어야 할 뿐 환경의 동의는 얻지 않는 질서 때문에> 우리가 환경을 아름답게, 질서정연하게 만든다는 구실로 얼마나 환경을 파괴하는지를 돌아보게 해준다. 진정한 질서는 '편안하고 질서있는 무질서'에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페터 빅셀이 좋아했던 제화공 해프리거 아저씨의 작업장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선진화되고 말끔해진 역에서 이제 더 이상 검은 그을음은 손에 묻히지 않지만 그로서는 기차를 놓치고 싶은 역도 잃어버렸다고 말이다. 돌아보니 그렇다. 도로가 넓어지고 속도가 빨라지고 집들이 높아지면서 기억 속 물이 흐르던 개울을 잃고 어린 시절 뛰놀던 골목을 잃어버리고 머물고 싶은 땅을 잃어가며 산다.

 

한때 어린 아이였다가 이제 어른이 된 우리. 그의 말처럼 인생의 크리스마스트리는 계속 세워지겠지만, 기다림과 기대는 더 이상 없는 시간들일지도 모른다. 그는 당부한다. <하지만 여러분의 크리스마스는 아름답기를. 그리고 꺼져가는 촛불의 그림자가 벽에서 깜빡일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하시기를.>

책을 덮고 그리고서도 오랫동안 페터 빅셀, 일흔의 목소리가 마음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