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내 사랑은 냉면 그릇 속 삶은 계란 반쪽

커피우유- 2010. 6. 16. 11:11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쫄면이나 비빔국수, 비빔냉면에 올려진 삶은 계란을 제일 좋아한다.

매콤한 면을 먹고 마지막으로 담백한 계란을 입에 물면 부드럽게 부서지는 달걀의 고소함에 얼얼해진 혀가 좀 진정이 되기도 하고 또 근사한 식사의 마무리 디저트인양 한 그릇이 풍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걀이 부서지지 않게 면을 살살 비비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아껴두는 것이다.

매운 면을 먹다가 이따금 보게 되는 흰자와 노른자의 선명한 색상대비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마지막에 맛볼 계란 반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다림은 즐겁다.

그러나 때로는 일부러 모르는 척 외면하며 붉게 비벼진 면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사랑도 그랬다.

나중에 사랑해야지. 어차피 내 것이니까 나중에 정말 많이 사랑해 줄거야...

 

 

그러나 시간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아끼고 아끼던 삶은 달걀 반쪽을 나는 삶에서 자주 놓쳐 버린다.

방심하는 사이 누군가가 홀랑 먹어버리고 만다.

"안 먹고 두길래 싫어하는 줄 알았지."

그 황당함이란...

나는 이내 아끼던 것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에 빠진다.

내게 주어진 겨우 반쪽일 뿐인 계란을 앗아간 그 무언가가 원망스럽다. 

시간을 지키지 못한 사랑만큼, 아껴둔 사랑만큼 바보같은 사랑이 또 있을까.

 

 

오늘도 내게는 하루치의 행복, 노랗게 삶은 달걀 반쪽이 얹어진 냉면 한 그릇이 주어진다.

이제 더 이상 내게 소중한 것들을 모른척 외면하다가, 나중으로 미루다가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고,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 또한 짧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엾은 내 사랑, 냉면 그릇 속의 잃어버린 숱한 계란 반쪽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내 것인 줄 알았던 나의 꿈, 나의 시간,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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