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 고래는 떠났어요

커피우유- 2010. 11. 9. 14:58

사랑의 뒷모습을 이리도 서늘하게 보여주는 책이 또 있을까.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에서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이 책은 기어이 보여주고야 만다. 어쩌면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 있는 사랑의 뒷모습. 한없이 <남루하고 무상한> 그것.

 

사랑의 설렘과 사랑의 피로와 사랑의 무상함과 사랑의 쓸쓸함을 한 식탁에서 만나는 듯한 책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네를 타듯 사랑의 신비함에 몸을 실어 하늘 높이 오르다가 어느 순간 맥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몹시 기운이 빠진다. 내게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역시 참 기운빠지게 하는 것이었는데 '11분'이 신뢰가 안되어서 기운빠진 것이었다면 이 책은 참담한 심정으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기운빠짐이다.

서늘하고 잘게 소름이 돋는다. 부인할 수 없다.

 

 

 

 

 

 

 

 

 

 *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는 게 좋겠다.

여자에게 소녀가 있는 것처럼 남자에게는 소년이 있다. 그 소년과 소녀는 성장하면서 깊이 수면 아래 묻혀지는 것이지만 사랑에 빠질 때 불쑥 만나지는 것이기도 하다. 불행했던 엄마에게서 소외감을 느끼며 결벽증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미흔 안의 소녀. 아홉 살 때 엄마를 잃어버리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아이가 돼 버린 규 안의 소년. 그 소년과 소녀가 만나버린 것이다.

 

 

 

파란색 표지의 책을 나는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야금야금 읽었다. 한꺼번에 모조리 삼켜버리기엔 너무 크게 싼 쌈처럼 이 책은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할 부분이 많았다. 한 단락을 읽고 창가에 기대어 생각해 잠기고, 또 한 단락을 읽고 설거지를 하며 생각에 잠기고, 된장찌개가 끓는 가스렌지 옆에 비스듬히 서서 또 한 단락을 읽어갔다.

 

사실 이 작품은 오래 전 영화로 먼저 만났다.

영화 속, 흙먼지가 이는 시골변두리의 휴게소에 무심히 앉아있는 여자가 무척 인상적인 영화였다. 영화 '바그다드까페'가 떠오르는 영화... 삶이 하찮아서 견딜 수 없던 여자는 자주 국도변의 휴게소에 나와 앉아 있다.

영화를 보면서 늘 궁금했던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랑의 기억만으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다고 느낀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답을 소설 원작에서 나는 찾고 싶었다. 그러나 결코 쉽게 답을 내주지 않는 책. 어쩌면 더 혼란스런 상태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삶이, 사랑이 단순하지 않음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이 책 속에서 사랑이란 삶이 흙먼지 뽀얗게 이는 변두리 휴게소에 어느 날 문득 놓여질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건같은 것이었다.

"괜찮아요?"

한마디로도 처음 보는 이에게 맘이 열리게 되는 사건. 구구절절 이유를 댈 수 없는 것. 웅크리고 있던 소년과 소녀가 불쑥 튕겨져나와 만나고야  마는 것. 그런 것.

 

 

 

 

*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사랑한다.

영화에서도 흙먼지 이는 국도변 휴게소 장면만큼 마지막 장면이 맘에 들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파 속에 묻혀 살아가는 미흔.

 

<나는 낯선 거리를 혼자 걷고 낯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낯선 상점에서 신문과 과일과 맥주와 시계에 넣을 건전지 따위를 산다. 그리고 이 낯모르는 도시에서 공교롭게도 사설 우체국의 여직원이 되었다. 지금은 퇴근을 해 광장 가장자리에 놓인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다. 저녁은 마치 커튼을 친 커다란 실내같이 나를 감싼다. 곧 군데군데 구멍난 낡은 벨벳 천 같은 밤이 오겠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세상을 향해 인사한다.>

 

 

사랑은 고래같은 것이어서 만나는 시간은 찰나에 머물고 기다림은 지루하다. 다시 고래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긴 기다림을 작가는 자끄 프레베르의 시를 들려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되묻는다. 세상에 이렇게 슬픈 시가 또 있을까.

 

...아주머니, 만약 누군가 찾아와 저에 대해

물으면 상냥하게 대답하세요

고래는 떠났어요

자,여기 앉으세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십오 년쯤 있으면, 아마 돌아올 거예요

 

 

고래는 떠났어요. 고래는 떠났어요..

이제 내 안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볼까.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다고 느끼는 그녀에게서 강해진 소녀를 만난다. 각인된 사랑이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간직된 사랑의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이 작품.. 영화도 좋고 소설도 좋다.

다만 빙글빙글 입 안을 맴돌던 달콤한 사탕을 다 먹어버리고 마지막에 남을 사랑의 그 쓸쓸함을 견딜 자신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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