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기형도

커피우유- 2010. 11. 28. 16:35

기형도. 내게는 특별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별. 어쩌면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의 줄임말 같은 존재...

 

버스를 타고 가다가 현수막에 걸린 기형도. 그 이름을 다시 만났다. 김밥 세 줄과 콩나물, 우유, 비스킷 따위가 든 봉지를 든 채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형도 시인학교에서 주최하는 어떤 모임 안내였는데 날짜는 12월 24일이었다.

 

*

기형도 그 이름과 함께 처음 시를 알게 되고 쓰게 되던 날들이 떠올랐다.

처음 시는 첫사랑처럼 내게로 왔다. 참 상투적이긴 한데 오빠의 친구, 내지는 교회오빠였던 그가 시를 썼다. 노트에 모닥불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적은 시를 읽어주곤 했는데 지금 그 시가 멋진 시였는지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이내 내 기억의 사정권을 벗어났고 사랑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때 처음 '시가 참 사람을 멋져 보이게 하는구나.' 하고 느꼈던 것 같다.

그 때부터였다.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시는 평범한 나를 뭔가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표적같은 거였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을 넣어보기도 하고 한껏 멋부리는 시를 써보기도 했다.

"시가 너무 어려워."

"네 시는 너무 어두워."

따위의 비평에 좌절도 하면서.. 왜 내게는 시의 뮤즈가 찾아오지 않는지 말라르메의 심연으로 가라앉기도 하면서. 그 무렵 릴케의 뮤즈라든지, 심연, 이런 단어들은 사춘기 소녀의 허영심을 채우는데 꼭 필요한 단어들이었다. --;;;

 

그러다가 정말 멋지고 완벽한 시를 만났다. 작은 동네 서점에서는 시집도 몇 권 꽂혀 있지 않아서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는데 대학이 있는 사거리 큰 서점에는 멋지고 멋진 시집들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버스를 갈아타고 두 정거장 쯤 걸어야 하는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서점에서 그 시를, 아니 기형도를 처음 만났다.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네 구절과 함께 기형도를 만났고, 그렇게 그의 시가 내게로 왔다. 숨이 멎는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하교길, 학교를 내려가는 내리막길에 저녁이 내려앉고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일부러 물끄러미 서 있어보기도 했다. 세상과 분리되는 것 같은 그 차가운 저녁공기의 느낌이 좋았다.

 

그 이후 기형도시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산문집도 모두 만났다.

그리고 여전히 내 안에 한줄기 빛으로 남아있다. 그는.. 시가 주는 기쁨과 슬픔, 꿈과 좌절감의 요약처럼-

 

 

- 앤서니 브라운 그림 동화 '숲 속으로' 중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 때로는 참 신비로운 시간을 달리는 것같다. 세월이 더 흐르고 흘러 지금 나는 기형도, 그가 살았던 도시에 살고 있다. 이 도시에서 나는 이따금 기형도 그 이름을 불쑥 불쑥 만나는 것이다. 운동장에 '엄마 생각'이 적힌 기형도 시비가 있고, 집 옆의 문화원에서는 기형도 시인학교를 운영하고 이 도시에서는 기형도 추모행사를 여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엇갈리는 길을 걷는 느낌이다.

 

*

12월 24일.. 시인 기형도는 어떤 모습으로 재현될까. 그 자리에 나는 갈 수 있을까.

꿈결처럼 되뇌어 본다. 햇살 내리 쬐는 27번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보면서 하염없이 어린 기억들을 더듬다가 눈 앞에 익숙한 풍경이 나타나면 김밥이 든 봉지와 장 봐 온 물건들이 잔뜩 담긴 봉지를 다시 꽉 붙잡으며 하차벨을 누른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버스의 진동을 몇 초간 견디다가 내려서야하는 것이다.

내게 남은 건 기억으로부터의 일상복귀.

점심은 김밥으로 하자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 뿐.

 

바람이 분다. 12월을 이틀 앞둔 겨울 바람이- 기. 형. 도. 그 이름은 슬프고. 나는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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