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커피 한 스푼, 위스키 한 스푼

커피우유- 2011. 2. 11. 12:15

커피 한 스푼 위스키 한 스푼

 

 

겨울이 드러누운 방 문턱 위로 이따금 봄이 염탐한다. 길게 햇살이 드리울 즈음 살짝 발뒤꿈치를 들고 타 넘기. 성공이다. 봄은 그렇게 몰래 숨어들어와 소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큭큭 소녀같은 웃음을 웃는다. "안녕?" 인사를 건넬까 하다가 그냥 모른척 베란다 창에 기대어 햇살을 쬔다. 이틀 전 내 놓은 로즈마리 분 두 개는 그새 베란다 공기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두꺼운 잠옷을 벗고 얇아진 잠옷 위로 아직은 바람이 차갑다.

물을 끓인다.

머그 잔을 준비하고. 커피 한 스푼 그리고 위스키 한 스푼.

위스키의 진한 기운이 그새 커피 알갱이 몇을 녹이는 중이다. 물을 붓기 전 위스키향과 커피향이 뒤섞인 잔 속의 향기를 맡는다. 커피와 위스키, 어쩌면 둘은 커피 위로 위스키가 떨어지는 순간 이미 진한 키스를 나누었으리라. 키스에 향이 있다면 이런 향이 났으면 좋겠다. 녹이고 데우고 함께 껴안은채 공기 중으로 피어오르는 이 따뜻한 향...

그 위에 끓는 물을 조로록 부어주면 겨울과 봄의 경계 어디쯤 아직 바람이 차가운 그런 날 아침. 딱 맞는 나만의 아이리쉬 커피가 완성된다.

 

향으로 먼저 행복해지는 커피다.

한 모금 목을 축이기 전에 이미 코가 행복을 맛보았다. 그 다음 입과 혀와 가슴이 느끼는 건 따뜻한 향기의 여운 뿐.

커피를 푼 물에 에센셜 오일처럼 위스키를 떨어뜨리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것처럼 가슴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몸이 데워진다. 읽고 있는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미소짓고 웃을 수 있다. 이 행복한 커피, 이 행복한 순간.

커피를 채운 머그잔의 수면이 낮아져 바닥에 가까와질 때 쯤이면 이제 이탄의 향이 난다. 이미 커피의 향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건 위스키의 잔향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경탄해 마지 않았던 이탄의 향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어쩐지 쓸쓸하고 어쩐지 황량한 기운이 감도는 마지막 향을 마저 비운다.

 

비워지면서 이내 차오르는 커피. 이제 내가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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