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생각하다

커피우유- 2010. 12. 1. 13:34

 

 

날이 추워지면서 가벼운 샤워보다는 욕조에 물을 채우고 들어앉아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 나른한 욕조 안에 들어앉아 읽는 책 <사랑을 생각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글은 '시간'에 대한 얘기지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이 글을 인용해서 사랑에 대입해도 같은 결론이 난다고 들려주는 것이다. 그렇지.. 하고 묵묵히 수긍하게 된다.

사랑에 대해 자신있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얘기하기는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어쩌면 사랑이란 것이 무수히 많은 단면을 가지고 있기에 사랑의 전체를 보기 힘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시작과 끝이 다르고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 또한 다르다.

<시인이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쓴다>는 그의 말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함',즉' 도대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실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붓이나 펜, 혹은 악기를 집어들도록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중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세 가지 사례를 들어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아니다. 어떤 것이 더 사랑에 가까운 것인지를 말해주는데 그가 가장 에로스의 본질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꼽은 건 어느 노작가의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그 사랑에는 도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으며,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바보같은 정욕으로만 가득찬 사랑도 안 되고, 두 사람에게만 집중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소외시키는 성스러운 광기도 안 되고, 예술로 승화되는 어느 노작가의 외사랑으로도 안 된다면..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는 사랑도 사람만큼이나 불완전한 것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하세계의 입구에서 결국 뒤돌아봄으로써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의 손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라고..

 

이 말이 가장 잘 '사랑'을 말해주는 것 같은 건 왜일까.

사랑을 생각하다 사람을 생각하고 그 소근소근거리는 것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 욕조 안의 물도 서서히 식어간다. 어떤 사랑처럼-

 

사랑에 대한 탐닉도, 현학적인 표현 하나 없이 사랑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들려주는 책 <사랑을 생각하다>

여전히 사랑을 모르는 채로 이 책을 덮는 게 좋겠다. 그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바람인지도 모르니까.

<도대체-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런 채로 그가 음악사적으로 가장 긴 오르가슴이라고 표현한 음악에 조용히 귀기울여 보는 것이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