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커피우유- 2010. 12. 22. 09:32

주말에 방문한 J님 블로그에서 만난 글에 여행가고 싶은 나라를 골라 클릭할 수 있게 링크가 걸려 있었다.

아. 그래. 실제로 여행가기는 쉽지 않으니 인터넷상에서 여행을 즐겨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게 내가 선택한 나라는 단연 아일랜드. 니치 베리의 글렌다로프 노래를 들은 이후로, 글렌다로프 사진들을 본 이후로 아일랜드를 동경하게 되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선마다 초록이 뒤덮여 있고, 양들이 한가로이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드문드문 작은 집들이 보이는 곳. 내가 보고 싶었던 아일랜드의 풍경들을 잔뜩 만나고 행복한 기분에 기운이 불끈 났다.

 

그리고 아일랜드.. 잊고 있던 그곳이 다시 떠올라 아일랜드를 알고 싶어 도서관을 찾았다. 미리 검색해 간 책은 실제로 보니 내가 원하는 아일랜드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대한 객관적인 이야기들 뿐이었다. 정말 몇 권 안 되는 아일랜드 관련 서적 중에 눈에 들어온 건 이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었다. 객관적인 사실들이 아닌 아일랜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저 빠듯한 일정 속에 무엇무엇을 잔뜩 보러다니는 여행이 아닌, 그곳에 여유롭게 머물며 그곳을 느끼고, 그곳 사람들을 느끼고, 어슬렁거리며 그곳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책 속에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만족할만큼 아일랜드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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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섬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교회 뒤켠의 묘지에는 해난사고로 죽은 이들의 묘표가 죽 서 있고 거기에는 이름은 없이 날짜만 적혀 있단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섬이지만 거기에는 고요한 슬픔과도 같은 것이 떨쳐 낼 수 없는 해초 냄새처럼 끈끈히 배어있다. 세상에는 섬의 수만큼 섬의 슬픔이 있다>고. 장례식이 있는 날이면 묘지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춥고 허전한 길, 그들은 위스키를 마시고 다 마시고 나면 잔도 병도 깨뜨려버려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관습이란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위스키로 축배를 든다.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위스키 잔을 비운다. 그것이 아일레이 섬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방문한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 섬과 아일랜드를 왜 위스키의 성지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특별히 아일레이 섬의 증류소들을 사랑했던 것 같다. 애정을 담뿍 담아 긴 지면을 할애한 걸 보면.

그가 특별히 사랑한 건 스카치 위스키 중에서 발아한 보리로만 만들어지는 '싱글 몰트'였다. 이 싱글 몰트가 수 천 종의 블렌디드 위스키의 근간이 되는 위스키란다. 그리고 그 싱글 몰트를 만들어내는 곳이 아일레이 섬이라는 것. 그러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따라 직접 산지를 방문한 셈이다. 그래서 그곳이 성지다.

 

나는 술을 즐기지 못하는데 이 책은 왜 이리 매력적인 것일까. 아마도 위스키. 그 자체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 술을 만드는 사람들, 그곳의 풍토에 그가 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보모어 싱글 몰트를 생산하는 보모어 증류소의 직원 짐 맥퀴엔이 들려주는 얘기가 참 아름답다.

 

<아일레이에서는 술통이 숨을 쉬거든. 창고가 해변에 있어서 술통은 우기동안 갯바람을 담뿍 머금지. 그리고 건기가 되면 이번에는 위스키가 그걸 술통 속에서 흠뻑 빨아들이는 거야.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아일레이의 독특하고 자연스런 향이 생겨나는 거야. 그리고 그 향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는 거지>

<가장 중요한 건 말이지. 무라카미씨. 가장 나중에 오는 건 사람이야.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만드는 거야>

아일레이 위스키의 특별한 맛에 대해 보리의 품질이 어떻다느니 물맛이 어떻다느니 이탄의 냄새가 어떻다느니 하고 사람들이 분석하지만 제일 나중에 위스키의 맛을 완성하는 건 바로 그 위스키를 만드는 사람들,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내가 지금 이렇게 만들고 있는 위스키가 세상에 나올 무렵, 어쩌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몰라. 그러나 그건 내가 만든 위스키거든. 정말이지 멋진 일 아니겠어?>

이런 마음으로 만드는 위스키라면 정말이지 반할 수 밖에 없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려주는 위스키 마시는 법.

<술잔에 물을 붓는다. 그리고는 술잔을 크게 한 번 돌려준다. 물이 위스키 속에서 천천히 회전한다. 맑은 물과 고운 호박 빛깔의 액체가 비중의 차이로 인해 잠시동안 뱅그르르 소용돌이치다가 이윽고 서로 녹아든다. 이 순간은 또 이 순간 나름대로 근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런 반짝거리는 문장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호박빛깔의 액체와 물이 하나로 녹아드는 모습. 너무 멋진 순간일 것 같다.

생굴에 싱글 몰트 위스키를 끼얹어 먹는 것도. ^__^ 

 

집에 그가 묻어 둔 스카치 위스키 생각이 문득 났다. 이 책을 읽으려면 최소한 스카치 위스키 한 모금 정도는 마셔줘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Ballantines 17Years Old라고 씌어있었다. 그렇다면 이 위스키도 누군가 오래 전에 만든 것이구나..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먼 시간 누군가에 의해 아일레이의 싱글몰트와 블렌딩 된 스카치 위스키다. 블렌딩 위스키는 얼음과 먹는 게 좋다고 했으니 그대로 따라본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마신 뒤 감도는 향. 이게 이탄의 향일까. 그가 말한 갯내음일까.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다행이다. 적어도 한 모금 정도는 맛볼 수 있어서.

 

 

 

아일랜드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일랜드. 아일랜드 이야기는 이 책의 후반부다.

그에게도 아일랜드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던 것 같다. 수줍고도 온화한 분위기의 아일랜드라고 제목을 붙였다.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내미는 것은 감동이나 경탄보다는 오히려 위안과 진정에 가까운 것이다>

<아일랜드를 여행하노라면, 그처럼 온화한 아일랜드적인 나날들이 조용히 우리 앞에 하나 하나 쌓여간다. 이 나라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나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진다. 하늘을 바라보거나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차츰 길어진다. 하지만 그것이 실로 다시는 경험하기 힘든 멋진 나날이었음을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Photo by transloid. Thank you for allowing photos.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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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참 삶과 닮았다. 어쩌면 사랑과도.

참 멋진 곳이었다. 참 멋진 사람이었다. 참 멋진 나날들이었다 라는 말로 기억에 떠올려지니까.

그가 들려준 아일랜드의 이야기들을 품고 나는 꿈을 꾼다. 그렇게 아일랜드처럼 온화한 나날들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