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영화이야기

첫사랑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었나요

커피우유- 2010. 12. 23. 06:58

영화도 여행처럼 영화를 보러 나가는 순간부터 영화의 기쁨이 시작되는 것 같다.

처음 찾은 영화관이라 출입구를 찾지 못해 건물을 빙글빙글 돌았다는 것도 그리 기분나쁘지 않았다. 제법 묵직한 느낌의 나이트클럽 간판 아래로 들어서야하는 입구도. 낯선 환경에 두리번 거리며 겨우 출입구를 찾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예매를 확인하고 티켓을 받아들며 그제서야 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다.

1: 47분. 아직 시간은 괜찮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팝콘도 살 수 있겠다.

극장에 들어선다. 아담한 사이즈. 바닥은 미끈하고 눈 앞에 붉은 시트를 씌운 좌석들이 죽 정렬해있다.

꼬마와 나. 그리고 어린 커플. 오늘 관객은 네 명이다.

하얀 스크린을 바라본다. 아직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이 하얀 스크린 위로 누군가의 삶이, 사랑이 동화처럼 가득차겠지. 기대만으로도 즐거운 건 영화가 시작되기 5분 전. 조용한 극장 안에 꼬마의 팝콘 씹는 소리만 들린다. 바스락 바스락.

 

꼬마가 슬픈 영화, 무서운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꼬마의 요구에도 부합하고 또 내게도 즐거운 영화는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된 영화는 '김종욱 찾기'

 

-절실하지가 않았거든요

-운명이 아니었던 거겠죠.

-아니요. 끝까지 사랑하지 않은 거더라구요. 제가.

 

이 영화. 사랑에 대해 절절하지 않아서 맘에 들었다.

10년 간 간직할 만큼,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그 거리의 느낌, 냄새처럼 긴 시간 그는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매일 밤 눈물로 그리워한다든지, 간절히 찾아 헤맨다든지, 술에 취해 친구에게 주정처럼 늘어놓는다든지 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심연에서 끄집어내듯이 이따금 여행의 기록들이 가득한 방에 앉아 가방을 열고 들여다보며 추억 속 사진을 쓰다듬는 게 전부다. 감히 기록들을 열어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기억 속 그 남자는 불쑥 불쑥 그녀의 일상에 끼어들어 그녀를 인도에 세워놓는다.

Hotel Destiny. 붉은 차도르, 복잡한 역에서 놓쳐버린 남자의 뒷모습, 아름다운 블루시티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자주 그를 만난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는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올까 두려워 읽지 못하는 소설의 엔딩같은 것이었다. 좋은 여운을 남기고 싶어 일부러 한 알 꼭 남겨두는 봉지 속 호두과자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미완인 채로 남아주기를 더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편이 더 완벽하니까. 그 편이 더 로맨틱하니까.

환상이다. 사랑은 완벽한 것도, 100%로매틱하기만 한 것도 아니지 않나. 결국 그녀의 '김종욱'은 그녀가 만든 환상 속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직감적으로 알았으리라 믿는다. 그가 운명의 상대가 아니었다는 사실.

운명의 상대는 뭐랄까. 좀 더 쉽게 오는 것 같다.

그렇게 주춤거리게 하고 두렵게 하고 돌아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서게 하고 두려움 따위 생기지도 않게 하고 천연덕스럽게 마주보게 하는 것.

미래가 상상되지 않는 상대는 어딘지 불안정한 느낌이다. 대낮을 견디지 못하는 사랑이거나 혹은 견딜 마음이 없거나.

 

그러니 첫사랑. 그것에 대해 가져야할 태도는 그리움이나 동경이 아니라 반성이다.

결국 절실하지 않았다.

결국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반성.

 

그런 이유로 그들은 두 번째 사랑을 택하기로 한다.

첫사랑이 아니므로 완벽할 필요도 없다. 로맨틱하지 않아도 그냥 좋다.

인도의 블루시티, 붉은색 차도르 없이도 그 어떤 후광 없이도 내 눈에 빛나는 사람.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뒷모습 보이지 않고 내 눈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 손 잡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키스할 수 있는 사람.

"한기준"이라고 서슴없이 이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외로운 우리는.

 

 

 

그들 뒤로 조용히 '김종욱'이 떠나간다.

아련한 베일 너머 숨쉬던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시간이다.

 

 

 

인도에서의 시간과 지우의 뮤지컬 연출 장면이 참 멋지게 어울리던 영화 '김종욱찾기'

영화를 보고 마트에 들러 장이나 봐와야지 했던 생각을 접고 그냥 묵묵히 걸어 집으로 왔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버스도 타기 싫었다. 김종욱, 혹은 '첫사랑'을 비행기 태워 떠나보낸 날이지 않은가.

이런 날은 무조건 걸어야한다.

 

그래도 봉지 속 호두 한 알 정도는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