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영화이야기

인생에 한번쯤 주인공이 되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커피우유- 2011. 2. 21. 11:15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 어느 집에서는 불이 켜지고 어느 집에서는 이미 일터로 향하는 걸음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 새벽의 이야기다. 우리가 깊이 잠이 들어 보지 못했던, 해가 뜨기 전 아직은 어두워 보이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알면서 조는 척 했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의 오래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장사나간 외할머니가 돌아오시기까지 어두운 방에서 어머니와 이모 둘만 남아 참 무서웠다는 이야기부터 어른들의 소개로 슬쩍 얼굴만 보고 아빠와 결혼한 이야기. 길고 춥고 어두운 그 이야기들...

몇 번을 반복해 말씀하시면서도 늘 새로운 이야기하듯 시선이 몽롱해지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리고 꼭 덧붙이는 말은 내가 살아온 거 책으로 내면 몇 권은 될 거다라는 말씀.

훗날에 알았다. 사람 하나에 이야기, 또 사람 하나에 이야기. 사람들은 저마다 긴 사연의 이야기책을 품고 산다는 것을.

그게 역사다. 길과 길이 모여 지도가 만들어지듯이 인생이야기들이 모여 역사가 된다.

긴 인생을 살아온 그들은 말하고 싶어한다. 누군가 들어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조금씩 무뎌지고 그렇게 아물어간다는 걸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읽은 그분들의 인생책 너머로 그분들을 바라보면 그저 마음이 싸-해진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 영화 역시 한 사람 한 사람 조금 주름지고 늙어가는 얼굴 위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부지런히 아이들을 길러냈던 젊은 시절이 있고, 상처투성이의 젊음이 있고, 후회될 뿐인 과거도 있다. 그리고 이제 한없이 조용해진 노년의 시간, 반복만 있는 일상에서 더 이상의 욕심은 없지만 그래도 다가오는 사랑을 숨길 수는 없다.

이 사랑은 줄 수 있는 게 없고 얼마의 시간 더 사랑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지만 이 사랑은 결코 약하지 않다.

이름도 없이 주민등록증도 없이 작은 방에서 서서히 시들어가던 그녀에게 '송이뿐'이라는 이쁜 이름을 지어주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 모르던 그(김만석)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작은 가죽 장갑 하나에도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기뻐하게 해 주었다.

참 가슴 아픈 또 하나의 사랑 장군봉. 그는 하루 세 시간밖에 잘 수 없어도 아내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살 수 있었다. 열심히 키운 세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가족에서 다시 부부가 된 그들에게 남은 건 아픈 몸 뿐이었지만 곁을 지켜주는 그가 있어 그의 아내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녀는 매일 새로 붙여진 도화지 가득 그녀의 꿈을 그렸다. 젊은 날 보았던 별처럼 흩날리던 벚꽃-

 

길을 가다 만나는 이들 모두 기막힌 인생의 파노라마를 한 권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온화해질 것 같다. 노년을 대하는 자세도 더 겸허해질 것 같다.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엎드려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굽은 등,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부지런했기에 거칠 수 밖에 없는 주름진 손,

듣기만 해도, 들어주기만 해도 그분들 역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인생에 한번쯤 주인공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예쁜 여배우가 기꺼이 조연이 되고 젊은 배우들이 기꺼이 조연이 되어 노년을 빛나게 만들어 준 참 아름다운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뵈면 부모님 얘기에 다시 귀기울여 들어보아야겠다.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끝나지 않는 그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