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수요일의 여자사우나, 훔쳐보기

커피우유- 2011. 1. 26. 06:24

'그날, 엄마를 따라 더 이상은 여탕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파라다이스에서 쫓겨난 '어린'사내아이들을 위해'

이 책의 첫 머리다. 그러나 이 책은 여자를 위해 쓰여졌다. 중년, 몸이 변하고 감정은 이유없이 널을 뛰고 스스로에게 몹시 낯설어하는 그런 시간을 사는 여자의 이야기. 곧 내가 지나가야할 시간이기도 하다.

 

카를라. 그녀의 취미는 훔쳐보기다. 노골적이고 천박한 훔쳐보기가 아니라 지하철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신문의 뒷면을 훔쳐보기. 그게 그녀의 훔쳐보기 취미의 내용이다. 이 훔쳐보기는 이따금 까페에서 맞은 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신문 뒷면이 되기도 한다. 신문의 뒷면으로 그녀는 신문 읽는 이의 취향을 가늠해본다. 가급적 그녀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뒷면으로 놓고 열심히 집중해서 읽는 이들에게 후한 점수가 매겨진다.

그녀는 짧지만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신문 부고란을 좋아한다. 물론 큰 머릿기사도 읽는다. 꽤 적극적인 취미활동을 즐기는 카를라는 누군가 읽고 있는 신문 뒷면을 읽기 위해 날마다 집을 나서서 지하철을 탄다. 그러면서도 신문을 사서 읽지는 않는다. 그녀의 취미는 훔쳐보기이므로.

 

어느 날. 펼쳐진 신문의 뒷면에서 흥미로운 칼럼을 발견했다. 칼럼의 제목은 '수요 사우나, 여자들의 수다'

퉁퉁하게 살찐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린 삽화가 있고 그 아래 그녀들이 사우나에서 나누는 대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칼럼 내용의 전부다.

다이어트에 대해서, 갱년기에 대해서, 남편, 섹스, 세탁과 청소, 남편들의 가사분담, 신체변화, 애완동물, 늙어가는 것에 대해서, 앙숙, 부엌, 미인, 유언장, 죽음에 대해서..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알몸 그 자체다.

 

-우리도 딱 아기들처럼 주름지고 울긋불긋해도, 점점 더 무시만 당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해?

-그건 막 태어난 아기들은 곧 주름들이 없어지고 예뻐지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태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우리는 화요일 운동 후, 금요일 금요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해요.

-일주일에 두 번이나?

-참 이제 금요일엔 안 해요. 시어머니가 오시기 때문이죠.

-저런...

 

수요사우나의 그녀들은 유쾌하다. 체중이 자꾸 쏠려 발이 넓어지고 커지는 것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은 알몸일 때 더 아름답다며 '미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부엌은 왜 늘 북향인지 거실 대신 부엌을 남향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한증막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그녀들은 어떤 호르몬제보다 건강에 효과 좋은 수다 중이다.

여자들의 수다는 무죄다.

 

'수요사우나' 연재칼럼에 매료되던 카를라, 활자로만 만나던 사우나 한증막 속으로 드디어 걸어들어간다. 땀을 흘리고 차가운 냉수를 끼얹는 일을 반복하면서 그녀의 갱년기 역시 활력을 되찾아간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 안에서 솟구치는 활력- 

성공적인 사우나 후 두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세상 모르게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사우나 칼럼의 마지막 편은 '죽음'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 함께 유쾌한 수다를 나누던 친구가 어느 날 빈자리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음은 사랑과 동격일 뿐이다. <사랑없는 죽음은 슬픔도 없습니다.>라는 카를라의 마지막 말.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죠.

수요일의 사우나. 그녀들이 사우나를 찾는 이유는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여자. 그녀들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갱년기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갱년기를 이해할 수 있다면 고부간의 갈등도 좀 줄어질 수 있지 않을까. 대개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를 맞게 되는 시점이 갱년기와 교묘하게 겹쳐진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고부 간이 고스란히 나누어 갖게 되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로.

사실 당사자가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갱년기가 아닐까.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고집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박증. 그건 서른을 앞둔 스물 아홉살의 고민이나 마흔을 앞둔 서른 아홉살의 고민과는 좀 다를 것 같다. 내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몸을 보아야하므로.

육중한 무게로 와닿을 수 있는 갱년기를 유쾌하게 맞아들이는 카를라.

그녀의 초청에 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수요사우나' 그녀들의 수다 속으로

 

 

'수요일의 여자 사우나' 책 속 삽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