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에쿠니 가오리, 詩로 만나다

커피우유- 2011. 1. 27. 06:47

아오이가 아니었다. '냉정과 열정사이Rosso'에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책을 읽던 그녀는 어쩌면 에쿠니 가오리 그녀 자신이었다.

 

시로 만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첫번째 시집.

<제비꽃 설탕절임> 달콤한 시집이다.

 

제비꽃 설탕 절임을 먹으면

단박에 나는 소녀로 돌아간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나

 

그녀가 꿈꾸는 건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나>다. 그리고 이 짧은 첫번째 시와 함께 나란히 걷다보면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그녀와 나를 조용히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이건 다 커버린 여자들의 꿈. 이 시집은 여자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시는 소설에서보다 조금 더 자기자신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시는 허구가 아니니 내 안의 정수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소설이 포옹이라면 시는 키스다. 그 사람의 유년, 꿈, 가족, 사랑.. 이 모두를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게 시다.

에쿠니 가오리 그녀도 자신의 이야기를 듬뿍 쏟아내었다. 별로 공통 분모가 없었던 엄마이야기(詩 포니테일/ 아홉 살), 남편에 대해 느끼는 신뢰와 사랑과 그만큼의 공허함(詩 단련된 몸/ 결혼생활/ 바람/키스), 아버지에 대한 기억, 유년의 단편적인 기억과 자기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시간들이 모여 한 권의 앨범같은 시가 되었다.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겁 많고, 외로움 잘 타고, 까다롭고, 예민한 그녀. 보듬어줘야 할 것만 같은 소녀가 시 안에 보인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 오싹

새로운 외로움이 밀려오겠지요

-詩 '오싹 외로워지겠지요'중에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고, 다른 이들이 꾸지 못할 꿈을 꾸면서도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다니. 유년기에 이미 그녀는 세상이 지니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불합리한 모순 같은 것, 결정적인 외로움들을 느꼈던 것 같다. 환경과 관계없이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평화롭고 햇살은 따스한>유년기에도 외로움은 자각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세상이 만만해지지 않는다.

 

행복하다 해도 좋은데

그저

주전자를 보고 있었어

텅 빈 몸으로

집이란 불가사의함 속에서

-詩 '주전자' 중에서

 

시 속의 그녀는 결혼 6년차. 시집 안에서 그녀의 사랑은 하나가 아니지만 남편과의 시간들이 참 이쁘게 담겼다. 어쩌면 아름답고 쓸쓸하고 따뜻하고 외롭고 바람이 부는 시간. 편안함과 느슨함이 공존하고 익숙함과 '잃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시간.

시 속의 그녀의 '남편'은 단련이 되어 늘 그녀를 품어주는 사람이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은 늘 대문 밖을 맴도는 그녀다.

 

당신 인생 한 모퉁이에 나를

보기좋게 껴맞추려 하지 말아요

...

우리, 방랑자 아니었나요?

-詩 '당신 인생 한 모퉁이에 나를' 중에서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 있든 다섯 시 종소리가 울리면 집으로 돌아오는 착한 여학생처럼 마음은 늘 집과 함께다. 벗어나지도 못할 그 헤메임은 <지구가 질려서/ 자전과 공전을/ 멈출 때까지>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오래된 키스를 떠올리며, 사랑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일본 영화 한 편을 본 기분. 그렇다.

시를 읽는데도 소설 한 권을 읽은 것도 같은 느낌. 그녀의 외로움과 마주한 느낌이다.

 

레스토랑의 버터는 동그랗고

은그릇에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인생이란 그렇게 동그랗게

은그릇에 예쁘게 담겨

내 앞에 놓여지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기

전에 이미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

-詩 '레스토랑의 버터'

       

시를 읽다보면 모든 것이 그저 담담해 진다. 그녀처럼 홀가분하게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말처럼 백년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테니...

삶은 그저 조금 외롭고 조금 쓸쓸한 바람이 부는 것일 뿐일테니...

어느 날은 행복하고, 어느 날은 외로운 것. 그 뿐.

 

<제비꽃설탕절임>책 속 일러스트. 황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