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쥘과의 하루, 이별이 유예된 시간 24시

커피우유- 2011. 2. 10. 06:29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 필요한 시간은 얼마일까. 그 이별이 더 이상 온기를 나눌 수 없는 죽음이라면.

 

늘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침대 속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고 웅크리고 누워 남편이 준비하는 막 끓인 커피향을 맡으며 아침을 맞는 알리스. 그녀는 나이가 많았고 관절이 편하지 않아 몸을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식탁에는 이미 남편 쥘이 준비해둔 식사가 준비돼 있었고 커피머신은 커피를 내리며 좋은 향기를 내고 있었다. 쥘은. 쥘은 소파에 앉아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로 조용히. 알리스는 조용히 그의 곁에 앉는다. 반쯤 감은 듯한 눈으로 창 밖만 바라보는 쥘. 그녀가 "쥘." 하고 불러보지만 답이 없다.

 

쥘. 그가 죽었다.

아침식사를 준비해두고 커피물까지 올려두고 소파에 앉아 쉬듯이 앉은 채로 그가 죽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 앞에서 알리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닦아 쥘에게 씌어주고 쥘의 슬리퍼를 찾아와 발에 신기고 무릎담요를 꺼내 와 덮어주었다. 그녀가 꿈꾸던 건 오히려 남편 쥘이 그녀의 임종을 지켜봐주는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쥘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남김없이 하고 그의 사랑을 확인하며 죽을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쥘. 그가 먼저 가버렸으므로.

알리스는 끊임없이 쥘에게 말을 걸며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면 좋을지를 의논했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예상하지 못한 이별.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쥘과의 하루가 필요했다. 그리고 해야할 못다한 이야기도 너무 많았다.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한. 그는 살아 있다. 그녀가 원하는 한.

아직 그에게 못 다한 말이 너무 많았다. 하루가 지나는 동안 하나씩 떠오를 것이다.

오늘 하루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어야했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뜨거운 물을 욕조에 담아 목욕을 하고, 그가 끓여준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아무 일도 없던 때와 마찬가지로 밥을 먹어야하고 배가 고파지고 졸리기도 하는 이 기막힌 슬픔. 알리스는 쥘의 몫까지 요리를 하고 쥘의 몫까지 먹었다.

 

다비드. 매일 아침 열 시 정각에 체스를 두러오는 자폐아 다비드가 있었다. 남들과 다른 세상을 사는 아이였으므로 알리스는 그 아이의 방문을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쥘과의 완벽한 하루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다비드. 그러나 상황이 다비드를 돌려보낼 수 없게 흘러갔다. 그렇게 쥘의 죽음을 함께 공유하게 된 다비드. 다비드는 그만의 방식으로 금새 이 상황에 적응해갔다. 홀로 쥘의 몫의 말까지 움직이며 체스를 이어나가는 다비드.

"쥘, 당신이 이겼어요."

마지막 승리를 쥘에게 안겨주면서.

 

삶이 주는 반전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녀에게 필요한 건 쥘의 죽음을 슬퍼하며 달려와 줄 수많은 이웃들이 아니었다.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관을 선택하게 하고 신속하게 죽음을 처리해줄 장의사는 더더욱 아니었다.

조용히 쥘의 옆에서 혼자만의 이별의 시간. 이 돌이킬 수 없는 잔혹한 이별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시간. 그녀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연약하고 외롭고 자폐를 앓는 다비드는 멋지게 공유해 주었고 그녀에게 꼭 필요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죽은 쥘도 이전의 쥘과 똑같이 인정해 주는 것. 그녀에게 쥘은 죽었으나 여전히 그녀의 쥘이었다. 그의 귓볼이 차가운 조약돌처럼 변하고 다리가 대리석처럼 차가워졌다해도 그녀에게는 그저 쥘이었다. 그녀의 첫사랑. 그녀가 처음 받아들인 남자이고 그녀 몰래 외도한 적이 있지만 그녀가 지킨 그녀의 사랑 쥘.

 

그녀는 이제 무엇을 입을지 그에게 의견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와인을 따르고 건배를 나눌 이가 없었다.

아침 신문을 읽으며 세상 소식을 들려줄 사람도, 잠자리의 온기를 나누어 가질 사람도 없었다.

그가 좋아하던 양고기 커틀릿도 더 이상 만들지 않을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홀로 느끼며 살아가야한다.

 

쥘과의 하루,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게 된 다비드의 마지막 말이 시처럼 알리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눈은 밖에 있고, 안은 따뜻해요.

-밤이예요. 이제 자야겠어요.

 

다비드의 말처럼 알리스, 그녀도 잠자리에 든다. "쥘.", "쥘..." 해야할 말을 모두 다 한 그녀는 잠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녀의 아침이 하루, 또 하루 찾아들 것이다. 그렇게 생은 또 이어지는 것이다.

 

 

마르탱 파주의 <비> 삽화 중에서. 발레리해밀그림.

 

그녀는 황금테가 둘린 와인잔 두 잔을 채워 하나를 쥘 앞에 놓았다.

"당신의 건강을 위해, 쥘"

그녀가 그를 향해 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가 함께 겪은 모든 것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