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비 내리는 12번 버스 속에 기형도, 그가 있다

커피우유- 2011. 7. 7. 12:01

 

 

비가 내리고 몹시도 지쳐있던 어느 날, 무심코 오른 버스 창 가에서 그의 시를 만났다. 그의 시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詩/엄마걱정

 

 

눅눅한 공기 속 앉아있는 사람들 틈으로 이쪽 창에도, 저쪽 창에도 그의 시들이 보였다.

오래된 서적, 전문가, 빈집...

 

그 후로도 몇 번 더 만났는데 버스가 바뀌면 그의 시도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왠지 모를 서늘함은 늘 동일했다.

그는 세상 모두를 그렇게 안쓰러운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의 시 '전문가' 속 아이들처럼 묵묵히 벽돌을 나르며 살아가는 내가 보이고, 우리가 보이고..

'오래된 서적' 속의 그, '흔해빠진 독서' 속의 그.. 그는 참 아프다.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기형도詩/흔해빠진 독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휴일의 행인이 되어. 나는 살아간다.

사랑따위 빈집에 가둬둔 채로, 아무 저항도 없이 묵묵히 벽돌을 나르며,

이따금 불쑥 불쑥 만나는 그의 시들에 깜짝깜짝 놀라며. 그렇게.

 

아나요. 안개는 여전한 두께로 도시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안개 속을 걷는 이들의 마음을 안쓰러워하는 당신의 시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울음을 터뜨릴 것만같은 그 얼굴, 굳은 얼굴들 그 이면까지 보아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오후 4시의 숲 > 숲 속의 짧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팥을 삶는 일  (0) 2011.09.02
Let Me Fall, 가을 그리고 노을  (0) 2011.08.25
커피 한 스푼, 위스키 한 스푼  (0) 2011.02.11
봄이 오는 걸까  (0) 2011.02.09
기형도  (0) 2010.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