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마르탱 파주의 <비> 비도 자살을 한다

커피우유- 2011. 2. 25. 06:31

비. 비가 주는 이미지가 나는 참 좋다.

비가 내리면 대기가 촉촉해지고 잊고 있던 흙냄새, 풀냄새도 맡을 수 있다. 심지어 비냄새까지도. 비가 내리는 날 천장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린 시절 집을 얼마나 아늑하게 만들었던가. 비가 내리는 날 전기포트에 커피를 몇 스푼 넣고 끓이는 커피향은 또 얼마나 향기로웠던가. 비가 내리는 날 비좁은 우산 속에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걸었던 일도 비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비는 미끈하게 잘 빠져서 그렇게 도도하고 매력적이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줄기 너머 아련하게 보이는 그리움이다. 사랑하되 온전히 가질 수 없고 그러면서도 평생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비. 나는 비 옆에 살고 싶다. 바다 옆에, 호수 옆에, 강 옆에. 비와 닮은 물 가까이.

비는 로맨틱하고 에로틱하고 섬세하고 때론 예민하고 성가시고 차갑고 그러다가 봉긋 가슴 속에 훈기가 솟게 한다. 사랑의 냄새와 가장 닮은 것이 있다면 비 냄새가 아닐까. 그렇게 비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테마다.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며, 느닷없이.>

 

마르탱 파주의 <>를 만난 건 내게 행운이다. 하나의 주제로,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비를 주제로 이토록 긴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마흔 여덟 편의 때론 짧고 때론 길고 때론 가볍고 때론 진중한 그의 비 이야기 속에서 발이 찰방찰방 비에 젖는다.

비에도 성격이 있어서 어떤 비는 감상적이고 어떤 비는 열정적이며, 소심하고 발랄한 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에는 어린 시절의 유전자가 들어있어 호스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치던 일, 물웅덩이를 폴짝폴짝 뛰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도. 또한 비는 전쟁을 멈추게 하기도 하고 탄환을 빗나가게도 하므로 그는 비에게 노벨평화상을 줘야한단다. 비는 풍경과 건물을 미화시키고 전쟁과 재앙에 의해 야기된 파괴를 고쳐준다.  비는 죽은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영혼이 우리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이고, 비틀대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지팡이가 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비는 소외되고 외로운 아이, 천덕꾸러기가 되기도 한다. 비는 에로틱해서 비가 내리는 날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고 음악은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을 위해 발명되었단다.

비가 내리는 날 카페, 영화관, 서점이 가득차고 우리는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되고 두건, 신문지, 외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달릴 수도 있다.

그는 손을 벌리고 고개를 들어 비, 그것을 맞아들이며 비의 유해를 맞아들여 마지막으로 품어준다. 자신의 품에서 가슴에 부딪혀 그 얼굴 위에서 죽는 비.

그는 비가 내리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고 말한다.

 

비가 내리는 날 왜 기분이 좋아지는지, 비를 왜 좋아하는지 내게 거듭거듭 확인시켜주는 마르탱 파주.

내가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젖고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젖은 머리, 젖은 옷, 흙탕물이 더러 튄 바짓단, 축축해지는 신발 따위 모조리 씻고 빨면 그만이다. 이런 날 샤워는 얼마나 개운한 것인가. 비는 주변부에 소외되어 있으며 다수가 싫어하기 때문에 비가 맘에 든다는 마르탱 파주의 의견에 공감한다. 나도 그처럼 비를 안아줘야지.

 

책 속 삽화. 그림. 발레리 해밀 Valerie C. Hamill

 

인류는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바다다. 따라서 각 인간은 통역할을 한다.

물은 우리의 혈관, 뼈, 그리고 꿈 속에서 쉰다.

그리고 우리의 타닌을 흡수한다.

그러니 우리가 질 좋은 와인이 되기를 희망해보자.

-마르탱 파주 <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