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를 심다/숲 책이야기

홀로코스트, 끝나지 않은 이야기

커피우유- 2011. 3. 30. 09:20

역사적 사실주의 관점으로만 표현되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해 얀 마텔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어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의 상상력이 가미된 홀로코스트는 그래서 새롭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파이이야기'이후 9년만에 나온 얀 마텔의 신작 '베아트리스와 버질'.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덮었다 열었다를 반복해야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으면서도 계속 부들부들 떨리는 이 기이한 울림의 의미는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야했다. 얀 마텔 그의 의도대로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사실적으로 다루지 않았음에도 왠지 살벌한 긴장이 감돈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진실이란 것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왠지 오싹 몸이 떨려오는 이 알 수 없는 진동.

 

이야기는 저자 얀 마텔을 대변하는 작가 헨리와 의문의 박제사 헨리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박제사 헨리가 자신의 희곡을 작가 헨리에게 보내면서 이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박제사 헨리의 희곡 작품 속 등장인물들인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버질은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여느 때처럼 아침 신문을 읽다가 어느 날 정부가 새로운 부류의 시민에 관련된 포고형을 내렸다는 기사를 읽는다. 시민에 속한 부류와 비시민에 속한 새로운 부류를 알리는 포고령이었다. 그리고 비시민에 속하는 새로운 부류에 자신이 해당한다는 사실을 버질은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박제사 헨리는 이 날의 버질의 심리를 이렇게 전한다.

"버질은 자신의 감정들이 위축되는 걸 안타까워합니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합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커져서 다른 감정들이 위축된 거라고 자신을 위로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지적인 감동, 미학적인 환희, 조용한 감상, 애정이 담긴 회상, 악의 없는 농담 등과 같은 감정들이 억눌린 까닭에 버질에게는 흐릿한 눈빛과 냉담한 가슴만이 남겨졌습니다."

라고. 그리고 이어진 도피의 길에서 버질과 베아트리스는 만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할까?

-그건 우리가 살아남을 때 말이지.

 

얀 마텔, 그는 헨리의 눈을 빌어 홀로코스트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려고 애썼다.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자와 많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어릿광대까지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려했다. 그런 의미에서 야생동물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박제가 되는 과정도 다른 눈으로 보면 홀로코스트와 다르지 않다. 억압받는 이들의 감정까지 눌리게 하고 그 어떤 인간적인 감상들마저 잃게 만든다면 이것 역시 홀로코스트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이 생명답지 못하게,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는 권력이나 다수의 힘, 혹은 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우리를 부들부들 떨리게 하는 것이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했다.

대사건, 대홍수, 대재앙, 대화마, 대혼란, 테러..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안되는 그 일에 대해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호러스'라 명명하기로 했다.

"지옥에서 국자로 수프를 떠내 생각할 수 없는 것과 상상할 수 없는 것, 대재앙과 대화마, 대혼란과 테러까지 담아 대접하는 것 같아."

그들은 '호러스'를 표현하는 단어들을 찾아 수집하기도 했다.

"고함원숭이, 검은 고양이, 말과 때때로의 침묵, 손짓, 한쪽 소매가 떨어져 나간 셔츠, 기도, 의회에서 회기를 시작할 때 갖는 기조연설, 노래, 음식접시, 퍼레이드의 장식 꽃수레, 구두모양으로 빚은 기념도자기, 테니스교습, 명백한 진실인 보통명사들, 하나의 긴단어, 목록,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공허한 격려, 목격자 증언, 종교적인 의식과 순례, 정의와 경의를 표하는 사적인 행위와 공적인 행위, 표정, 두번째 손짓, 말에 의한 표현, [원문 그대로]희곡, 노볼리프키 거리 68번지,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 문신, 어떤 해를 상징하는 물건, 아우키츠. "

그들의 '호러스'는 하나의 긴 단어로 표현하자면 <애처롭고 유감스러운 상황 Thepityofitallwhensomuchpossible>, <잘못 들어온 사악한 공간 Evilivingroomanerroneously>이 되었고, 명백한 진실인 보통명사로 표현하자면 <살인자, 도살자, 학살자, 고문자, 약탈자, 강도, 강간범, 폭행범, 야수, 괴물, 악귀>같은 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비밀 암호같은 단어들로 그들이 남기고 싶어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때로 우리가 맞닥뜨리는 '호러스'의 상황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말과 때때로의 침묵이 필요할 뿐인지도 모른다.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공허한 격려처럼 깊고 넓어 메우지 못할 간격일지도 모른다.

삶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죽은 걸 슬퍼한 이들의 이야기, 기억하면서도 계속 살아가려고, 알면서도 행복하려고. 그러기 위해서 베아트리스와 버질, 그들은 남기고 말해야했다. 말과 침묵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책의 말미 카드처럼 제시된 12가지의 구스타프를 위한 게임은 절로 침묵하게 한다. 어떤 공허한 격려도, 어떤 말들도 빛과 힘을 잃어버리는 카드들이다.

게임 2

 

 

당신은 이발사다. 당신은 사람들로 가득찬 방에서 일하고 있다. 당신이 그들의 털을 깎으면 그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당신은 매일 하루종일 그 일을 한다.  

한 무리가 다시 끌려왔다. 그들 중에서 당신의 절친한 친구의 아내와 여동생을 알아본다. 그들도 당신을 알아보고 반가운 눈인사를 보낸다. 당신은 그들과 포옹을 나눈다. 그들이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운명에 대해 묻는다.

 

당신은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리고 빈 칸으로 남겨진 마지막 한 장 게임 13. 홀로코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베아트리스와 버질

저자
얀 마텔 지음
출판사
작가정신 | 2011-0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인간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하는 잔혹하고 환상적인 우화!세계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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