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팥을 삶는 일

커피우유- 2011. 9. 2. 10:00

여름이면 마트에 가서 팥을 산다.

진공포장된 비닐 속 색이 선명한 신선한 팥알들이 500g씩 지퍼백으로 소포장되어 있다.

 

그릇에 부으면 촤르르 진주알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팥.

한 두 번 물에 씻어낸 후 물을 넉넉히 붓고 불려준다. 팥은 위쪽에서부터 보들보들 물기를 머금고 커지기 시작한다. 하룻밤쯤 불리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 서너 시간 있다 냄비에 부으면 위쪽 절반만 불어 있고 아래쪽 팥들은 처음 모습 그대로 고집스럽게 남아있다.

"시간이 필요해요. 나는 느리단 말이예요. "

항변하는 것만 같다.

 

나는 그 항변 위로 가만히 물을 붓고 가스렌지 위에 올린다.

부르르 끓어오르면서 붉은 팥물이 녹아난다.

체에 받쳐 팥이 달아나지 않도록 하면서 붉게 우러난 첫물을 따라 버리고 다시 물을 부어 끓여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팥은 제법 쪼글쪼글 물에 불은 모습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줄게.

 천천히 천천히 한 모금 두 모금 물을 먹고 너를 보여주렴. "

물을 넉넉히 넣고 이번에는 지그시 끓여낸다.

 

속도가 느린 팥은 사랑에도, 다른 것에도 속도가 느린 내 모습을 닮았다.

팥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불리는 시간에도, 끓이는 시간에도 좀체 보드라운 속살을 잘 보이려들지 않는다. 이제 되었겠지 하고 건드려보면 여전히 꽝꽝 말라붙은 옥수수 알맹이 같다. 어림없다. 느리게 느리게 지켜봐주고 기다려주는 이에게만 마음을 여는 팥.

 

어쩌면 세상의 소중한 것들이 다 이 팥의 체질을 닮았다.

서두르지 않는 자에게, 마음을 비우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자에게 삶이 주는 기쁨 같은 것들이  모두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아이가 자라고 꿈을 키워가는 이 모든 일들이 팥을 삶듯 묵묵히 기다릴 일이다.

꿈쩍 않을 것같은 팥도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열린다. 절로 으스러지고야만다.

 

보드랍게 녹아내린 팥물과 팥알맹이 위로 위로처럼 설탕을 쏟아붓고 같이 마음이 달구어진다. 이미 주방은 열기로 가득하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냄비 속이 잘박잘박 물이 빠지기 시작하는 갯벌같다.

이때다. 불을 끄고 이제 식혀둔다. 소독한 병에 담고 냉장고에 보관해 둔다. 녹아내린 사랑이 거기 가득 들었다. 이 보라빛 팥이 여름내내 시원한 팥빙수를 제공해 줄것이다.

 

"내 사랑도 너처럼 무르게 익어 누군가에게 달콤함을 주면 좋겠다. "

물러질 줄 모르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팥을 삶는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