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느질 가을, 나는 나약해진다. 바삭바삭 물기 마른 잎사귀 떨어뜨리는 가을 나무같이 내 안의 물기도 소진되는 계절. 그 가을을 견디고자 바느질감을 붙들고 앉았다. 큼직한 체크가 든 기모 원단 세 마, 보얀 첫눈같은 아이보리 극세사 세 마로 원단을 준비했다. 이 원단들로 커튼 한 장..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1.11.08
팥을 삶는 일 여름이면 마트에 가서 팥을 산다. 진공포장된 비닐 속 색이 선명한 신선한 팥알들이 500g씩 지퍼백으로 소포장되어 있다. 그릇에 부으면 촤르르 진주알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팥. 한 두 번 물에 씻어낸 후 물을 넉넉히 붓고 불려준다. 팥은 위쪽에서부터 보들보들 물기를 머금고 커지기 시작한..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1.09.02
Let Me Fall, 가을 그리고 노을 가을은 노을로 다가온다. 늦여름 하늘가를 붉게 물들이며 짙은 푸르름으로 내려앉는다. Fall. 가을을 Fall이라 이름붙인 건 얼마나 절묘한지. 지난 주 바라본 마로니에는 벌써 잎끝이 가장자리부터 말라가고 있었다. 플라타너스는 이미 잎 몇을 바삭 말린 채로 바닥에 떨구고 있었다. 메타세쿼이아잎도 ..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1.08.25
비 내리는 12번 버스 속에 기형도, 그가 있다 비가 내리고 몹시도 지쳐있던 어느 날, 무심코 오른 버스 창 가에서 그의 시를 만났다. 그의 시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1.07.07
커피 한 스푼, 위스키 한 스푼 커피 한 스푼 위스키 한 스푼 겨울이 드러누운 방 문턱 위로 이따금 봄이 염탐한다. 길게 햇살이 드리울 즈음 살짝 발뒤꿈치를 들고 타 넘기. 성공이다. 봄은 그렇게 몰래 숨어들어와 소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큭큭 소녀같은 웃음을 웃는다. "안녕?" 인사를 건넬까 하다가 그냥 모른척 베란다 창에 ..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1.02.11
봄이 오는 걸까 봄이 온다고 느낀다. 창문을 모조리 열고 대청소가 하고 싶어질 때, 좁은 거실에 들여놓은 화분들을 이제 베란다로 내 놓고 싶어질 때, 그간 쓰던 그릇들을 그릇장에 들여놓고 연두색 그릇세트를 내놓고 싶어질 때, 알 수 없는 활기가 가슴에 들이차 힘차게 그릇을 씻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예전에는 ..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1.02.09
기형도 기형도. 내게는 특별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별. 어쩌면 내가 꿈꾸는 모든 것의 줄임말 같은 존재... 버스를 타고 가다가 현수막에 걸린 기형도. 그 이름을 다시 만났다. 김밥 세 줄과 콩나물, 우유, 비스킷 따위가 든 봉지를 든 채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형도 시인학교에서 주최하는 ..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0.11.28
기타 등등 어느 휴일 아침 차를 타고 나가는 길에 우유 500ml를 사 주고 나눠 먹기로 했다. 요즘 들어 글자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맛있는 우유 GT" 라고 읽어 주었다. 아이는 "서울우유"라고 읽는다. 고집쟁이. 나를 닮았다. 나는 아이에게 우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서울우유, 매일우유, 남양..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0.10.14
도서관에서 이상한 일이다. 책들이 빽빽이 꽂힌 서가 사이를 거닐 때면 어김없이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레고 심지어 두근거리며 약간의 흥분과 함께 배가 아프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향에 반응하는 이 증상이 꽤 오래 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오래된 책들 속에 일종의 독특한 흥분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나..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0.09.03
8월의 창가에서 책읽기 오후 세 시, 창 앞에 접이식 식탁을 편다. 창가에는 아침에 물을 준 로즈마리가 생생하다. 8월의 끝은 제법 바람이 풍성해서 독서하기에 좋다. 부엌으로 가서 포도 한 송이를 씻는다. 세제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거품목욕을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30초. 세어보면 제법 긴 시간이다. 잘 씻은 .. 오후 4시의 숲/숲 속의 짧은 생각 2010.08.31